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및 노동조합 문제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발표한 대국민 사과문엔 2개의 ‘특별한’ 메시지가 담겼다. 예상 답지에는 없었다는 의미에서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지난 3월11일 삼성과 이 부회장에게 던진 주문 목록에도 없었다. 하나는 “자녀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힌 내용이다. 여론은 재벌 최초의 4세 승계 포기 선언이라고 반응했다.
다른 하나는 “한 차원 더 높게 비약하는 새로운 삼성을 꿈꾸며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하겠다”는 발언이다. 대국민 사과문에 기업의 미래 비전과 사업계획 발표가 끼어든 모양새다. 일반인과 주주 등을 향한 발언이지만, 재계에선 “또다른 메시지 수신처를 염두에 둔 것 같다”는 분석도 나왔다. 정부와 여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부회장이 실제 정부·여당을 얼마나 염두에 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런 분석이 나오는 배경은 있다. 코로나19로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지난 3월 한 달에만 전달에 견줘 68만명(계절조정 취업자 기준)이 일자리를 잃었다. 항공·정유·자동차 등 주력 업종 대기업도 자금난을 호소한다. 이 부회장의 발언은 정부·여당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삼성그룹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 실적설명회(IR)에서 기존 시설투자(연간 기준 약 20조원) 계획을 변함없이 유지한다고 밝힌 바도 있다. 실제 현 정부 출범 이후 삼성과 정부 간의 묘한 어울림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로 거론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중 이 부회장과 처음 만난 건 2018년 7월 삼성전자의 인도 노이다 스마트폰 공장 준공식에서였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부쩍 늘어난 건 2019년에 들어서다. 공교롭게도 설비투자(국민계정 기준)가 급격히 감소하며 집권 초반 경제 성장세가 꺾이던 시기와 맞물린다. 지난 2월13일 문 대통령과 주요 재벌 그룹 총수와의 회동까지 포함하면 이 부회장은 문 대통령을 13차례 만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이 부회장과 3번의 독대를 포함해 총 8번 만났다.
문 대통령은 2019년 1월 청와대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삼성 공장 방문을 요청하는 이 부회장에게 “삼성이 대규모 투자를 해서 공장을 짓는다거나 연구소를 만든다면 언제든지 가겠다”고 화답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약속대로 지난해 4월30일 삼성전자 경기도 화성사업장의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과 11월10일 삼성디스플레이의 13조 신규투자 발표 때 충남 아산사업장을 방문해 격려와 감사를 표했다. 아산 방문 때 문 대통령은 삼성의 “과감한 도전을 응원한다”는 말도 남겼다.
문 대통령이 재판 중인 기업 총수와 잦은 만남을 갖는 데 대한 비판적인 일부 시각에 대해, 그간 청와대와 삼성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지난해 4월 관련 질문을 받은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사람을 만나러 간 게 아니라 시스템반도체를 선도적으로 하는 곳을 간 것”이라며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시스템반도체를 키워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라고 답변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의 6일 사과문 발표를 놓고 청와대는 물론 집권 여당의 주요 인사들은 별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시민단체나 지난 총선에 당선된 정치 신인들만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이용우 국회의원 당선자(경기도 고양정)는 이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경영권 이양 권한은 주주에게 있는데 이재용 부회장이 권한이 없는 이야기를 했다”며 “삼성 문제를 바라볼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주주 권한과 경영진의 권한을 서로 혼동하는 데 있다”고 꼬집었다.
구본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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