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제네시스 GV80 출시 행사에 참석한 알버트 비어만 현대자동차 연구개발본부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현대차 제공
“외부 수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기술 유출 걱정에 순혈주의를 고수하는 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같다.”
현대자동차의 한 임원은 경쟁사 임원 영입 열풍을 두고 최근 이렇게 말했다. 외부 수혈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뜻이다. 상법 개정으로 회사 기밀을 빼갈 수 있는 경쟁사 인물이 이사회에 진입할 수 있다며 우려하는 재계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경영 일선의 풍경이다.
11일 현대·기아차 설명을 종합하면, 2015년 이후 두 회사가 영입한 경쟁사 출신 임원은 최소 30명이다. 이는 해외 판매법인에 근무 중인 임원을 제외한 수치다. 독일 베엠베(BMW) 출신이 7명(중복 포함)으로 가장 많고, 폴크스바겐과 다임러그룹 출신이 각각 5명이다. 최근에는 니오의 내장디자인 총괄 출신 요한 페이즌과 바오넝그룹 출신 리펑 등 중국 비중도 늘었다.
이들은 현대·기아차의 심장에서 일하고 있다. 2015년 합류한 알버트 비어만 연구개발본부장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는 정의선 회장표 고성능·고급화 전략의 핵심 주역이다. 비어만은 베엠베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며 고성능 브랜드 ‘M’을 완성한 인물이다. “현대차도 고급·고성능 브랜드가 있어야 기술 개발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정 회장이 직접 그의 영입에 관여했다. 현대차에 둥지를 튼 비어만 본부장은 고성능 브랜드 ‘N’과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 출시에 앞장섰다. 그는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2018년 사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연구개발본부장에 임명됐고, 지난해에는 외국인 최초로 현대차 사내이사 자리에 올랐다.
현대차그룹 외부 인재 영입은 미래차 전략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지난 5년간 영입한 임원 중 10명 이상이 기술 인력이다. 신사업의 경우 이들 비중이 더욱 높다. 수소전기트럭 등을 맡고 있는 마이크 지글러 현대차 상용해외신사업추진실장과 마틴 자일링어 현대·기아차 상용개발담당 부사장은 모두 다임러트럭에서 옮겨 왔다. 현대차 관계자는 “미래차 전환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급변하면서 자체 인력 양성만으로는 시장의 요구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외국 출신 임원들이)변화에 상대적으로 더 열려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사회에도 외부 수혈이 진행 중이다. 2018년 지배구조 개편이 시장의 반발로 무산된 이후 나타난 변화이다. 지난해 알버트 비어만 사장을 사내이사로, 미국 자산운용사 캐피털 인터내셔널 출신 유진 오와 스위스 투자은행 유비에스(UBS) 임원을 지낸 윤치원씨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총수 일가의 측근들로만 구성됐던 이사회에 처음으로 바깥 바람이 분 셈이다.
최근 2조원대 규모의 세타2 엔진 충당금을 쌓기로 한 이례적인 결정의 배경에도 이런 이사회 구성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회 핵심 인사는 “(세타2 엔진 관련해)이사회에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며 “외국 출신 이사들이 늘면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회사를 맞추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에 기밀 유출 등 스파이 스캔들은 여태껏 일어나지 않았다.
이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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