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지난달 26일 오후 세종시 반곡동 한국개발연구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세종/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 경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서비스 산업에 소비가 있고 일자리가 있다. 정부의 산업 정책이 제조업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증세 필요성도 강조했다. 우리 경제가 ‘1%대 저성장’ 기조에 들어선 만큼 “증세 없이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위기 대응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재벌과 조세 개혁은 매우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유동성 거품 우려에 대해서는 “뉴딜 정책 등으로 유동성 통로를 산업 쪽으로 유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년간 국내 대표적인 싱크탱크를 이끈 최 원장은 이달 말 퇴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한국형 선진국 모델을 설계하는 게 과제”라고 조언했다. 최 원장은 오랜 세월 재벌과 대기업 문제에 천착해온 학자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시민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해왔다.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세종시 한국개발연구원에서 했다.
―지난해 코로나 위기 영향으로 국내총생산(GDP)이 1% 역성장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매우 선방했다고 본다. 민간소비 침체가 심했고 투자도 줄었지만, 재정을 확장하고 금융을 완화해서 역성장을 최소화했다. 재정 역할이 가장 컸다. 수출 역시 뒷받침됐고.”
―‘재정 역할론’을 두고 논란이 많다. 부족하다는 쪽과 너무 과하다는 쪽이 계속 부닥친다. 4차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이 4일 국회에 제출되는데.
“우리가 코로나 위기에 나름 선방한 것은 재정이 튼튼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국가 재정의 위기 대응 수준은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이라고 본다. 문제는 일자리인데 재정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일자리는 궁극적으로 민간에서 흡수해야 한다. 거기에 재정을 너무 과다하게 넣을 순 없다. 코로나 위기가 지나가고 나면 민간 활력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개선되리라 본다. 그때까지는 재정이 재난 지원과 피해 보상 등으로 최대한 일자리를 방어하고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재정 지출은 위기 극복 수준에서 이뤄지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다른 나라보다 우리가 더 어렵다면 모를까, 지난해 코로나 위기도 잘 방어하지 않았나.”
―확장 재정에 따른 국가 채무 부담이 늘고 있다. 재정건전성을 어떤 수준에서 관리하는 게 적절한가?
“코로나 영향으로 세수는 줄고 재정 적자 폭은 더 커질 것이다. 국가채무비율(GDP 대비) 증가 속도가 너무 빠른 게 문제다. 현재 40% 후반인데, 50% 선에서 안정되면 감내할 수 있지만, 계속 증가세가 지속되면 곤란하다고 본다. 현 수준에서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남북관계 진전에 대비한 재정 소요도 생각해야 한다. 재정건전성을 유지해야 대응 여력이 생긴다.”
―안정적인 재정을 위한 증세론이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다. 학계에서도 여러 제안이 나오고 있는데.
“한국 경제는 ‘성장률 1%대’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기술 향상과 자본 축적 수준이 이젠 고도성장기를 지났다. 전통적인 자본주의 선진국 대열에 우리도 들어선 것이다. 저성장 기조는 불가피하다고 보고 그 전제하에 저출산·고령화 속에서 어떻게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것인가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증세는 불가피하다. 증세 없인 해결할 수 없다. 증세 문제는 정치권에서 꺼내기 힘든 이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번 정부에서 어렵다면 다음 정부에선 반드시 세제와 예산 개혁을 해서 저성장 기조에 맞게 틀을 바꿔야 한다.”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증세가 이뤄져야 한다고 보나?
“우리나라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 둘 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낮다. 불요불급한 지출을 조정하는 등 재정 효율을 높이고 좀 더 공평한 과세를 해야 한다. 조세 투명성을 높여 과세 사각지대를 막는 것도 필요하다. 누진율을 좀 더 올려 공평 과세를 강화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과세 면세점을 더 낮춰서 납세액은 적더라도 더 많은 이들이 세금을 내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 그래야 조세 형평성을 유지하면서 증세를 설득할 수 있다. 부가가치세는 아시다시피 역진적 성격이 있다.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각국의 코로나 위기 대응 과정에서 실물과 금융 간 괴리가 커졌다. 유동성 거품 우려도 높다. 최근 금리 오름세에 따라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유동성은 넘치지만 물가는 안정적인 상황이다. 실물 경제는 역성장하는데 주식·부동산은 오르고 있다. 자산시장의 거품, 실물과 금융의 비정상적 괴리 여부를 판단하는 건 쉬운 문제는 아니다. 과거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주요국들이 국가 재정 투입으로 경기침체를 방어하는 케인지언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문제는 코로나 이후 유동성 회수기에 어떻게 연착륙하느냐다. 코로나 위기가 마무리되면 정상화 정책을 시의적절하게 써야 한다. 뉴딜 정책 등으로 유동성 통로를 산업 쪽으로 돌리고, 소비와 투자로 유인해야 한다. 지금은 돈이 갈 데가 없지만, 실물이 살아나면 돈의 흐름이 달라질 거라 본다.”
―아파트 값이 급등하면서 민생 불안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미시 정책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는데.
“부동산은 특수한 재화다. 공급 부족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유동성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본다. 일시적인 측면이 강하다. 주택이 거주가 아닌 재테크 수단이 됐다. 이제야 주식시장에 눈을 돌리는 상황이다. 코로나 위기 때 풀린 유동성과 금융 완화로 부동산에 돈이 몰리는 건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 정책당국만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집 없는 서민들한테는 큰 부담이자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모든 물가는 상대 가격이라는 게 있는데 지금 주택 가격은 다른 재화에 비해 너무 과도하게 올랐다. 그 균형점이 깨진 상태가 장시간 지속되긴 어렵다. 일본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시장 충격이 컸는데, 우리도 유동성 회수기에 접어들면 힘들어질까 우려된다.”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지난달 26일 오후 세종시 반곡동 한국개발연구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종/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84까지 떨어졌다. 오이시디 평균(1.63명)의 절반 수준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인구 감소의 악순환을 좀처럼 되돌리지 못하고 있는데.
“베이비붐 시대 연간 100만명 출산에서 이젠 30만명도 무너졌다. 이 추세라면 사회·경제 시스템이 다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인구절벽을 지날 때 세대 간에 엄청난 고통과 갈등이 유발될 것이다. 감내하기 힘들다. 일본도 1억명을 마지노선으로 인구 정책을 펴고 있는데, 우리도 5천만명을 마지노선으로 삼든지 해야 한다. 솔직히 저출산 문제를 돈과 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있나 싶다. 지금 과거와 달리 대부분 맞벌이인데 양육과 보육을 사회화하지 못하고 있다. 이 외에도 출산으로 인해 인생이 불안해지는 요소가 너무 많다. 출산이 자신에게 혜택이 된다고 인식하는 수준까지 보육과 교육, 주거를 최대한 지원해야 한다.”
―코로나 위기 과정에서 드러난 국내 산업과 기업의 경쟁력은 어떻게 보나?
“우리 제조업은 선진국 수준에 다다랐다고 본다. 코로나 위기에도 반도체·자동차 등 수출 산업이 선전했다. 조선·철강·석유화학 등 다른 주력 기업들도 경쟁력을 유지하며 반전 기회를 맞고 있다. 코로나 이후 제조업, 4차 산업은 이젠 디지털 기술 승부로 가는 거다. 주요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 변화에 맞춰 인공지능이나 전기차,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에 잘 대비하고 있다. 재작년 일본이 수출 규제를 했을 때도 우려와 달리 자체적인 글로벌 밸류체인(공급망)과 네트워크로 잘 극복하지 않았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산업 정책 측면에서는 어디에 집중해야 하나?
“선진국과 비교할 때 비중도 생산성도 크게 낙후된 게 서비스 산업이다. 서비스 산업을 업그레이드해야 실질적인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본다. 서비스 산업에 소비가 있고, 일자리가 있다. 제조업이 나아갈 방향인 디지털 중심의 4차 산업은 고용 창출에는 한계가 많다. 과거 중화학공업, 정보기술(IT) 산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했듯이 이젠 서비스 산업을 키워야 할 때다. 중국도 내수와 서비스로 이미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우리 정부의 산업 정책은 여전히 제조업에 매몰돼 있다. 코로나 때문에 지금 대면 서비스 산업이 워낙 위축돼 있지만, 코로나가 마무리되면 가장 빨리 집중할 곳이 서비스 산업이다. 제조업은 디지털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가고, 새로운 기회는 서비스 산업에서 찾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 4년차다. 경제 정책 측면에서 지난 4년을 평가한다면?
“대체적으로 경제 운용은 잘했지만 개혁은 미진했다. 특히 재벌과 조세 개혁에 거의 손을 못 댔다. 가장 긍정적 성과를 꼽자면 코로나 위기 대처라고 본다. 오이시디 회원국 중 가장 선방한 케이스다. 물론 케이(K)방역이 든든한 밑바탕이 된 덕분이다. 재정 확장을 적시에 적절하게 한 것도 잘한 일이다. 외국에서는 한국을 위기 대응의 모범 사례로 평가하는데, 국내 평가는 너무 인색한 것 같다. 재벌 개혁은 부족하고 아쉽다. 거의 손을 못 댔다.”
―재벌 개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미흡했다고 보나? 3·4세 경영으로 가면서 변화 흐름도 감지되지 않나?
“재벌 개혁의 핵심은 재벌 의존도와 집중도를 완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습적 황제경영 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입법적 접근이 거의 없었다. 미국·일본·유럽 기업들과 달리 한국 대기업은 거의 100% 오너 세습경영 체제다. 지금 3·4세 승계까지 갔는데 현 총수들이 경영을 할 시간이 20~30년 남았고, 여전히 후대 자식들도 경영 수업을 하고 있다. 개선될 조짐이 잘 안 보인다. 경영권 지분을 세습하려니 돈이 부족하고, 편법이나 위법 행위를 무릅쓰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훌륭한 전문경영인들이 회사 경영보다는 젊은 세습 오너 회장 모시는 일에 자기 능력을 다 소진한다.”
―재벌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지난해 오너 전횡을 완화하기 위한 상법 개정이 이뤄지기도 했는데.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세계적인 흐름을 따르면 된다. 창업 시절엔 창업주 자신이 전문경영인이다. 이건 외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3세는 상속 지분이 쪼개지고 자연스레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는 게 일반적이다. 경영은 전문경영인 시스템으로 가고 오너의 힘은 크게 줄여야 한다. 독일의 경영위원회처럼 이사회 내부에 소액주주 등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해 투명성을 강화하고 오너들의 의사결정권을 견제해야 한다. 지난해 상법이 개정됐지만 국회에 가서 크게 약화됐다. 역대 정부가 재벌 개혁 한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경기가 좋을 땐 잘한다는 이유로, 나쁠 땐 경기 살린다는 핑계로 사실상 손을 대지 않았다. 개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불특정 다수이고, 사회적 이익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그러니 개혁에 동의하는 세력은 소극적인 반면 저항하는 세력은 강하고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한국개발연구원 창립 50년을 맞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다. 앞으로 어떤 국가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나?
“한국개발연구원은 고도성장기에 정부와 콜라보해서 이론적인 견인차 구실을 충실히 했고, 국제적인 싱크탱크 수준의 반열에 오른 성공적인 모델이다. 지금까지는 성공 스토리라고 본다. 이제 우리나라는 ‘30-50 클럽'(1인당 소득 3만달러, 인구 5천만명)의 일곱번째 가입국이 됐다. ‘40년 법칙’ 같은 게 있다. 일본의 고도성장기는 1950년대 시작해 90년대 이후 제로 성장 시대를 맞았다. 중국은 70년대 개혁·개방 뒤 고속성장을 하다 이젠 한자릿수 성장률의 성숙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도 6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40년 초고속 성장이 외환위기 이후 마무리됐다. 한 세대 기간 동안 자본과 기술, 노동이 축적되면 어느 정도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다는 경험칙이다. 우리도 이젠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어떤 선진국으로 갈 것이냐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은 그런 국가 장래를 설계하는 기관이다. ‘삶의 질’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한국형 선진국 모델을 설계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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