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2020년 1월 ‘기후위기와 지속가능성’이 투자의사 결정의 가장 핵심 이슈라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1년. ‘이에스지(ESG) 경영’이 글로벌 투자와 경영의 ‘뉴노멀’로 급부상했다. ESG는 환경·사회·기업지배구조를 중시하는 투자·경영 전략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내 대표적인 ESG 전문가인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코로나 위기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기후변화 중시 정책이 ESG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코로나로 인해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투자자들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을 더욱 중시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류 대표는 “ESG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대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한국이 ESG를 제대로 해서 기회를 살리면 도약할 수 있지만, 그 반대면 글로벌 자본의 외면을 받게 된다”고 기회와 위기가 공존함을 강조했다. 또 “단기투자를 하는 금융기관은 ESG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만큼 국민연금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금융위원회가 2030년부터 모든 상장사에 ESG 정보 공시를 의무화하기로 한 것은 국제 추세를 고려하면 늑장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류 대표와의 인터뷰는 지난 12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 아이티(IT)밸리의 사무실에서 했다.
―3월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ESG가 한국 경제의 최대 화두다. ESG를 안 하면 사업은 물론 자금 조달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기업과 금융 모두 생존 문제로 인식하면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케이비금융지주가 지난해 12월 ESG 경영을 선언하며 국내 처음으로 이사회 안에 ESG위원회를 만들었다. 이후 신한금융·카카오·남양유업·우리금융 등이 뒤따랐다. 일반 기업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금융기관은 ESG를 잘하는 기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최근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금호석유화학, 한국앤컴퍼니에서도 도전자 쪽에서 ESG를 새로운 경영 방향으로 내세울 정도다. 관련 기사의 급증세도 놀랍다. 2006년에는 ESG 기사를 포털에서 검색하면 서너건 정도였는데, 지난해에는 4만건으로 늘었고, 올해는 지난해의 서너배는 될 것이다.”
―지난해 전세계에서 ‘탄소 제로’를 경영 목표로 내건 기업이 한해 전보다 3배 늘고,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ESG 운용자산 규모도 45조달러로 전체 자산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한다. 글로벌 경제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투자 결정 과정에 ESG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단순히 ESG를 잘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소극적 방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통해 ESG 경영을 하도록 압박한다.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입만 열면 ESG를 강조한다.”
―이전에도 기업사회책임(CSR), 공유가치창출(CSV)과 같은 비슷한 개념이 있었다. ESG와 차이는?
“뿌리는 같지만 결이 다르다. 기업사회책임은 기업이 사회와 더불어 가야 할 책임을 강조한다. 이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게 대표적이다. 미국의 경영학자인 마이클 포터가 제시한 공유가치창출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 이행과 경영상 이익을 모두 추구한다는 점에서 보다 전략적이다. ESG는 투자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06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주도로 유엔 책임투자원칙(PRI)이 출범하면서 본격화했다. 가입 기관이 올해 1월 현재 3613개로 세계적인 연기금, 자산운용사가 대부분 망라돼 있다. 이들의 전체 운용자산은 100조달러를 넘는다. 서스틴베스트도 2007년 한국에서 처음 가입했다.”
―유엔 책임투자가 출범한 것은 15년 전이다. 최근 급부상한 이유는?
“코로나 위기와 바이든 미 행정부의 기후변화 중시 정책이 결정적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가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발표했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환경 파괴와 동물 서식지 훼손 등이 코로나의 원인일 수 있다는 뜻이다. 17세기 산업혁명 이후 환경 파괴, 이산화탄소(CO₂) 배출로 기후변화를 초래한 인류의 생존 방식을 바꿔야 한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해 코로나 발병 초기 ESG 퇴조를 예상했다. 위기에서는 생존이 최우선 과제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 이런 예측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복귀하도록 했다. 또 ESG를 중시하는 블랙록 출신을 중용했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인 브라이언 디스와 재무부 2인자인 부장관 모두 블랙록 출신이다.”
―올해 ESG와 관련해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각국 정부가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그린화’다. 한국 정부도 지난해 7월 ‘그린 뉴딜’을 포함한 ‘한국판 뉴딜’을 발표하고, 10월에는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자는 ‘탄소 넷 제로’(탄소 중립)를 선언했다. 이에스지와 관련된 정보 공개도 확산하고 있다. 유럽 기업은 이미 2021년 재무제표 작성 시 인권·노동·환경·기업투명성 등 비재무적 성과를 공시하도록 의무화했다. 인도·홍콩도 정보 공개를 의무화했고, 일본도 조만간 할 예정이다. 정보 공개 표준화를 위한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한국은 2016년 사우디 등과 함께 ‘4대 기후 악당’으로 지목됐다. 한국 기업의 ESG 수준은?
“글로벌 투자자그룹인 ‘기후행동 100+’가 탄소 배출량이 많은 167개 기업을 ‘기후 악당’으로 발표했다. 이 중 한국 기업도 포스코, 한국전력, 에스케이이노베이션 등 3곳이 포함됐다. ESG 준비가 안 된 기업으로서는 태풍을 만난 셈이다.”
―새로운 흐름이나 유행을 빨리 캐치업(따라붙기)하는 게 한국 기업의 능력인데.
“ESG위원회 구성을 서두르는 것도 그런 능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개념 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보인다. 잘못하면
‘붕어 없는 붕어빵’처럼 생색내기나 보여주기에 그칠 수 있다. 과거 ‘기업사회책임 워싱(위장)’처럼 ‘ESG 워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ESG 워싱’ 사례는?
“영국 석유회사인 비피(BP)는 1990년대부터 ‘석유을 넘어서’를 기치로 내걸어 친환경 실천 베스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멕시코만 원유시추선에서 대규모 원유 유출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됐다. 독일의 자동차회사인 폭스바겐도 환경을 중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15년 디젤차의 CO2 배출량을 속인 디젤게이트가 발생하면서, 시가총액이 단기적으로 30%나 격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최근 15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들을 대상으로 국내 기업 중 ESG 경영을 잘하는 곳을 물었는데 에스케이, 엘지화학, 삼성전자, 케이비금융이 꼽혔다. 이들 중에는 총수가 뇌물 공여 혐의로 실형을 받거나, 사업기회 유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 조사를 받는 곳도 있는데?
“ESG는 정성적 평가도 하기 때문에 평가기관의 독립성이 중요하다. 전경련은 재벌 이해를 대변하고, 증권사는 기업 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가 결과를 신뢰하기 힘들다.”
―서스틴베스트의 평가 결과는 어떤가?
“섹터(업종)별, 자산규모별로 나눠서 평가한다.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의 경우 케이티, 신한지주, 엘지생활건강 등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국내 글로벌 기업들은 대체로 무난한 수준이지만, 그 밑의 기업들은 격차가 크다.”
―지난해 말 지배구조개선을 위한 ‘공정경제 3법’ 개정에 기업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감사위원 분리선임 및 대주주 의결권 3% 제한을 담은 상법 개정이 대표적인데, ESG 측면에서는 어떻게 보나?
“자산운용사들은 ESG 중에서도 지배구조를 가장 중요시한다. 이사회가 거수기에 그치고, 감사위원의 독립성이 부족하다 보니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한 기업 합병·분리나 사익 편취로 소수 주주들이 앉아서 손해를 본다. 사외이사나 감사위원이 경영진을 감시·견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상법 개정은 불가피했다.”
―한국에 시급한 과제는?
“기업들이 자기 특성에 맞는 ESG 전략을 찾아야 한다. 에너지 다소비 기업은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등 환경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금융은 사회적 책임과 지배구조가 중요하다. 물론 여신 심사를 할 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기업을 우대할 수 있다. ESG 경영을 무조건 규범 위주로만 접근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지배구조도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오너 체제와 전문경영인 체제 등 기업 특성이나 환경에 따라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
―ESG를 위해서는 투자자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의 최대 투자자는 국민연금이다.
“김용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지난해 11월 2022년까지 자산의 50%에 ESG 투자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는 전체 자산 830조원 중 5% 정도만 적용하고 있다. 실제 기금을 운용하는 기금운용본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늬만 ESG’ 투자에 그칠 수 있다. ESG를 정확히 분석해서 투자하고, (문제 기업을 상대로) 주주 관여 활동을 제대로 하고, 위탁운용사에 위임할 때도 ESG 기준을 반영하는지 살펴야 한다. 단기투자를 하는 금융기관은 ESG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국민연금이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일본도 후생연금(GPIF)이 드라이브를 걸었다.”
―정보공개 의무화와 표준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데, 한국은 어떤가?
“ESG 투자를 제대로 하려면 신뢰할 만한 관련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공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2030년부터 모든 상장사에 ESG 정보 공시를 의무화하기로 했는데, 글로벌 흐름에 비춰보면 너무 늦다. 안이하다고 할 정도다. 한국 기업이 ESG를 제대로 하면 단기성 헤지펀드가 아닌 장기투자를 하는 ESG 펀드가 국내에 더 많이 들어온다. 디지털 전환, 풍력·태양광·수소전기차 등 ESG 관련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한국 기업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바꿀 수 있다. 반대로 ESG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면 글로벌 자본이 한국을 외면하게 된다.”
―ESG가 한국 경제와 기업에 기회와 위기의 양면을 갖고 있다는 얘기인데, ESG 경영을 내실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ESG가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되고, 일상 경영에 내재화돼야 한다. 탄소 배출이 많은 기업은 구체적으로 감축 계획을 세워서 실천해야 한다. 또 결과를 공개해서, 환경단체로부터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최고경영자가 직접 챙겨야 한다.”
―ESG 관련 생태계 전체가 제대로 구축되어야 할 텐데.
“국민연금 같은 자산 오너, 자산운용사, 평가기관 같은 서비스 공급업체로 구성된 ESG 생태계가 동반 발전해야 한다. 특히 ESG 평가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하려면 평가업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근 많은 기관들이 ESG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법무법인, 언론사 등이 앞다퉈 진출하고 있다. 교육, 평가, 컨설팅을 병행하는 경우도 많다. 전경련이 2007~2008년 생산성본부의 ESG 평가를 믿지 못하겠다고 발표한 일이 있다. 생산성본부는 기업의 ESG 평가를 하면서 동시에 컨설팅을 했다. 과외 선생님이 학교 시험 출제위원을 겸한 꼴이다. ESG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ESG 버블’을 막으려면 독립성, 대주주 자격 같은 설립 요건을 둘 필요가 있다.”
jskwak@hani.co.kr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국내 대표적인 이에스지(ESG) 전문가로 꼽힌다. 2006년 ESG 평가회사인 서스틴베스트를 설립한 이후 ESG와 사회책임투자의 불모지와 같은 한국 자본시장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사회투자, 국민연금, 사회책임투자포럼 등 ESG와 관련된 다양한 기관의 운영위원과 이사를 역임했다. 지금도 기획재정부 연금투자풀 운영위원, 한국투자공사 운영위원, 공무원연금공단 자산운용위원을 맡고 있다. 2019년 말에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창립을 주도했다.
류 대표는 2000년 초반까지 이른바 잘나가는 ‘증권맨’이었다. 그가 증권가를 떠날 때 상당수가 의아해했다고 한다. 류 대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의 글로벌 최고경영자였던 데이비드 블러드다. 그는 2003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함께 차세대에 미치는 영향을 투자 결정에서 가장 중시하는 자산운용사인 ‘제너레이션’을 창립했다. 류 대표는 “돈벌이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그 결과가 국내 첫 ESG와 사회책임투자 전문 평가회사인 서스틴베스트의 설립이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에스케이-에스케이씨앤씨 합병, 2018년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등 불공정 논란이 제기된 사안에서 모두 주주들에게 반대 의결권 행사를 권고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