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치(LH) 사태’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합니다. 정부·여당이 연일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민심은 싸늘합니다. 엘에이치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이 국회와 공직사회 전반으로 번졌습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동산 투기를 근절할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저는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봅니다. 차제에 망국병인 땅 투기의 부패 사슬을 완전히 드러내고, 실효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면 말이죠.
‘LH 사태’로 폭발한 부동산 민심 일파만파
투기의 대상이 되는 개발 예정지 대부분은 전답, 즉 농지입니다. 농지는 원칙적으로 농사를 직접 짓는 농업인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습니다. ‘경자유전의 원칙’을 명시한 헌법상 그렇게 돼 있습니다. 과연 현실은 어떤가요? 정부 통계를 보면, 전국 농지의 44%는 비농민, 즉 외지인 소유입니다. 전국 농지의 절반 가까이가 부재지주인 겁니다. 외지인 소유 비율은 25년 전 33%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농업인이 아니면 소유도, 경작도 금지한 헌법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거죠.
왜 이런 일이 빚어진 걸까요? 현행 농지법에도 농지는 농업인과 농업법인만 소유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일반인이 취득하려면 실제로 농사를 짓는다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어떤 작물을 얼마나 짓겠다는 농업경영계획서, 실제 농사를 짓고 있다고 동네 이장님이 사인해 준 자경확인서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농지취득자격증명서가 나오고, 등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서류상 제출하면 그만입니다. 실제 농사를 짓는지 사실상 확인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아무 작물이나 심어 놓고 방치해도 농사로 인정해줍니다. 설사 허위 사실이 발각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자체가 강제매각을 명령할 수 있지만, 안 지켜도 소유권을 박탈하진 못 하니까요.
굳이 농사를 짓는다고 입증하지 않아도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예외조항도 많습니다. 무려 16개에 달합니다. 상속 농지는 물론이고, 경사율이 높아도, 농사를 짓다 포기해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1000㎡ 이하 주말농장도 예외입니다. 이번에 투기 의혹이 드러난 엘에이치 직원들도 허위서류를 작성하거나 예외조항을 악용한 사례입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외지인 농지 소유자 수만명이 쌀 생산농가를 지원하는 직불금까지 뻔뻔하게 받아간 사실이 드러나 큰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짜 농민 행세를 하면서 사실상 아무나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헌법의 경자유전 원칙이 하위법인 농지법에서 무력화된 셈입니다.
21대 국회의원의 25%, 넷 중 한명꼴로 농지를 소유하고 있다. 한겨레TV
시민단체 경실련이 조사한 결과,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관할하는 정부 고위공직자 1862명 중 38%가 농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21대 국회의원의 25%, 넷 중 한 명꼴로 농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실제 농사를 짓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물론 부재지주를 모두 투기 목적이라 볼 순 없습니다. 농지 소유 기준이 느슨해지는 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국내 농업의 쇠락입니다. 쌀을 제외하곤 곡물 자급률이 거의 0%이고, 쌀조차도 정부 직불금으로 연명하는 상황 아닙니까? 이젠 자경 농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등록 농업인은 전체 인구의 7~8%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농지 본래의 생산가치보다 ‘개발 예정지’로서의 투자가치만 남은 꼴입니다. 엘에이치 사태 이후 정부는 농지위원회를 만들어 일반인의 농지 구매를 엄격히 심사하고 자금조달계획서까지 따로 받겠다고 합니다만, 농업이 처한 구조적인 문제의 해법을 함께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투기공화국’ 서막 올린 박정희의 ‘강남 개발’
1963년 서울 강북의 고급 주택가였던 신당동은 평당 3만원이었다. 강남구 학동보다 무려 100배 이상 차이가 났지만, 20년 만에 강남 땅값이 강북 땅값을 역전했다. 한겨레TV
강북고등학교의 강남 이전 현황. 한겨레TV
대한민국의 부동산 투기는 서울의 개발과 무한팽창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보면, 조선시대 때도 한양 도성의 사대문 안쪽은 주택난이 무척 심했습니다. 서울의 종로구 인사동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 강남에 해당하는데, 집값이 워낙 비싸서 웬만한 사대부들이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선 중기에 ‘성저십리’라 해서 ‘한양 넓히기’에 나섭니다. 사대문을 기준으로 도성 바깥쪽 동서남북 십리 이내에 대규모 주택 단지를 조성한 겁니다. 지금의 신도시와 아주 비슷한 콘셉트입니다.
근래에 들어 대규모 서울 팽창의 분기점은 바로 ‘강남 개발’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인구가 몰려들면서 강북 인구가 15년 만에 두배로 늘었습니다. 집값이 뛰고 투기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1967년엔 부동산 양도차익에 무조건 50%의 세금을 중과하는 특별법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때 한강 건너 남쪽, 이른바 ‘남서울 개발계획’이 시작됩니다. 그 출발점이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 착공입니다.
없던 땅도 대거 만들어냅니다. 공유수면매립법을 만들어 한강 변 남북에 새로운 택지를 조성한 겁니다. 1967년 동부이촌동을 시작으로 지금의 반포, 잠실, 흑석동, 압구정동 등이 모래사장에서 대규모 택지로 탈바꿈합니다.
권력층의 땅 투기도 이때 시작됩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니, 권력층 실세들 대부분이 쿠데타에 가담한 군 출신이었습니다. 이들과 그 배우자들이 강남땅 이곳저곳을 사들이며 ‘복부인’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냅니다. 1966년 한남대교 착공 당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땅값은 평당 200~300원, 자장면 한 그릇이 40원 하던 시절이니 다섯 그릇이면 한 평을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강북의 고급 주택가였던 신당동은 평당 3만원이었습니다. 무려 100배 이상 차이가 났었지만, 20년 만에 강남 땅값이 강북 땅값을 역전합니다. 강남땅을 입도선매한 복부인들이 엄청난 차익을 챙긴 건 물론이겠죠.
임권택 감독의 영화 <복부인>의 한 장면. 한겨레TV
강남에 땅 투기가 몰린 과정엔 두 개의 중요한 트리거가 있습니다. 바로 학군과 지하철입니다.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들의 강남 이전, 그리고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 순환선 계획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강남땅 상승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투기 억제 vs 경기 부양, ‘부동산 10년 주기’ 악순환
최근 40년 동안 부동산 경기는 10년 단위의 일정한 사이클을 나타냅니다. 부동산 경기가 과열일 땐 투기 억제와 공급 대책이, 냉각기 땐 각종 규제 완화와 부양책이 반복됐습니다.
노태우 정부 때는 주택난이 심했습니다. 토지공개념을 도입하고 1기 신도시 계획을 내놨습니다. 강력한 투기 억제와 공급 대책으로 시장 안정을 꾀한 거죠. 김영삼 정부 시절엔 집값이 상대적으로 안정됐습니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닥쳤습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경기 부양이 시급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분양권 전매 제한 등 부동산 규제를 대폭 풀어줍니다. 노무현 정부 들어 규제 완화의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집값이 뛰고 투기가 극성을 부립니다. 노무현 정부는 강력한 대출 규제를 하고 종부세를 도입해 세제를 강화합니다. 판교·동탄 등 2기 신도시 건설도 약속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규제 강화 덕분에 이명박 정부 초기 부동산 시장은 다시 안정됩니다. 그런데 또 금융위기를 맞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사실상 종부세를 무력화하고, 뉴타운, 4대강 등 건설 경기 부양에 힘을 쏟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대출 규제를 확 풀어줍니다. 빚내서 집 사라던 때가 이때입니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 들어 집값이 다시 뜁니다. 투기 억제를 위해 종부세를 되살리고, 대출 규제도 다시 강화합니다. 그리고 3기 신도시 등 대규모 공급 계획을 내놓기에 이릅니다.
부동산 투기 역시 부동산 경기와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따라 부침하며 진화했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 처음으로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이론 인해 불법·탈법적 부동산 보유로 꽤 많은 공직자가 옷을 벗었습니다. 이후 부동산 투기는 훨씬 더 전문화, 기업화됩니다. 더는 소수 권력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김대중 정부 때 분양권 전매 제한이 폐지되자 분양권과 청약통장을 거래하는 이른바 ‘떴다방’이 활개를 칩니다. 기획부동산도 나타납니다. 여러분도 가끔 ‘좋은 땅이 있는 데 관심 없냐’는 전화 받으신 기억이 있으시죠? 돈이 될 만한 땅, 개발이 유력한 곳들을 미끼로 투자자들을 유인합니다. 토지 보상과 분양권을 늘리려는 지분 쪼개기도 기획부동산이 도입한 수법입니다.
시기는 다르지만, 복부인에서 떴다방, 기획부동산으로 투기의 뿌리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씁쓸합니다.
문 대통령은 ‘부동산 적폐와의 전쟁’ 승리할까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선 “부동산 적폐 청산”을 선언했다. 한겨레TV
엘에이치 사태 이후, 행정력을 총동원한 전수조사와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정부·여당은 하루가 멀다 하고 투기 근절책, 재발 방지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바쁩니다. 이번 사태 이후 대통령 메시지가 거의 하루 한 번꼴로 나오고 있습니다. 16일 국무회의에선 “부동산 적폐 청산”을 선언했습니다. 그만큼 민심 이반이 심각하다는 반증일 겁니다.
정부 대책의 주된 내용은 투기 예방과 적발, 처벌 및 부당이득 환수입니다. 부동산 투기를 아예 시도하지 못하도록 하고, 시도한다면 반드시 적발하며, 적발하면 강력히 처벌하고 부당이득을 회수하는 패키지 대책을 이달 말까지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여당은 이미 이해충돌방지법을 포함해 ‘투기 근절 5법’의 입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부동산 투기가 특정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국민들도 다 압니다. 또 뿌리 깊은 부패 사슬이 하루아침에 근절되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니, 선거용으로 서둘러 급조하거나 선거가 끝났다고 흐지부지할 일이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 부동산 투기 근절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높습니다. 그만큼 정책의 수용성 또한 높은 때입니다. 강력하고 실효적인 정책과 입법으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낼지 논썰이 여러분과 함께 지켜보겠습니다.
기획·출연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PD azu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