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지적재산권 위험성 간파하고
쉼 없이 싸운 참지식인이자 운동가
카피레프트·의약품접근권 운동 앞장
투병 중 ‘지재권과 인권’ 박사논문도
가난한 지식약자의 다시 없을 대변자
쉼 없이 싸운 참지식인이자 운동가
카피레프트·의약품접근권 운동 앞장
투병 중 ‘지재권과 인권’ 박사논문도
가난한 지식약자의 다시 없을 대변자
【가신이의 발자취】 고 남희섭 변리사를 기리며
코로나 백신 논란을 통해 우리는 배웠다. 백신을 개발한 개인, 기관 또는 나라는 세세연년 권세를 누리고 떼돈을 번다는 것을. 남희섭이 그랬다.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소크 박사가 ‘백신에 특허는 없다’고 말한 것처럼, 코로나 백신에는 특허권 신청도 부여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금처럼 그의 생각과 실천이 아쉬운 적이 있었을까, 하지만 뭐가 그리 급했던지 지난 10일 총총히 우리 곁을 떠났다.
남희섭은 특허변호사 곧 변리사였다. 우리 사회에서 변리사는 그 무슨 반대운동 같은 것 하지 않는다면 최고 소득이 보장된 직업군이다. 그런데도 돈벌이에 눈이 먼 업계 내 고립과 눈총을 마다치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내던지며 지금과 같은 특허 제도를, 곧 특허를 반대하는 ‘유일한’ 특허변호사였다.
나는 그를 2006년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캠페인 때 남대문 근처 그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이래 긴 세월 알고 지냈다. 남희섭은 의문의 여지 없이 발군의 지재권 전문가다. 한미에프티에이 안에 ‘지재권 조항’이 가진 고도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일찍 인지하고 쉼 없는 투쟁을 벌여 온 참지식인이자 운동가 그리고 동지였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도 우리 시민사회를 대변하던 국제활동가였다. 지재권에 대한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지식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게 그와 나, 우리는 한팀이었다. 관련 주제로 티브이 토론이 있을 때, 그의 치밀한 반대 논변 때문에 당시 참여정부에게는 매우 거북한 패널이었다.
촛불운동 때 그는 독일 유학 중이었고 혼자 집안에서 촛불을 밝히며 싸움을 이어 나갔던 일화는 지인 사이에선 이미 전설이다. 돌아와서도 끝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고, 카피레프트운동이나 지재권 공유운동, 의약품접근권운동도 그가 선구자 중 하나다. 초국적 의료자본의 ‘카피라이트’가 예컨대 코로나19 백신처럼 지재권 수입국 민중의 ‘고혈’을 빨아 먹는 것이기에, 그는 그 부당함에 맞선 보기 드문 전문가였다.
대장암 발병과 이후 재발에도 남희섭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영국에서 ‘지재권과 인권’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역시 선구적인 업적 아닌가. 에프티에이 등 통상협정의 인권영향평가는 그가 사실상 최초로 공론화했다. 요컨대 ‘지식경제’, ‘지식재산권’ 등 대중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으나 미래경제의 중심인 영역에서 무권리상태로 배제되고 탈취당하는 말 못하는 ‘약한 다수’, ‘지식약자’의 다시없을 대변자였다.
공교롭게도 남희섭은 나의 동네 이웃이다. 주차장이건 승강기건 그와 종종 마주칠 때마다 병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에 차라리 나조차도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떠나기 얼마 전에도 큰 눈망울의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힘주어 설명하곤 했다. 암이 그 마지막 단계로 치달을 즈음 그의 통증을 줄이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애썼던 기억이지만 서럽게도 너무 늦은 뒤였다.
나이 55살,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으로 그를 보냈다. 부디 아픔 없는 곳에서 모든 것 내려놓고 편히 쉬기를. 나머지는 빛났던 남희섭의 시간을 기억하는 뒷사람들에게 맡겨 두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이해영/한신대 교수
지난 10일 별세한 고 남희섭 지식연구소 공방 소장. 이해영 교수 제공
고 남희섭(오른쪽 둘째) 변리사와 필자 이해영(맨왼쪽) 교수는 2006년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운동 때부터 시민사회를 대변하는 활동을 함께 해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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