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8일 방문한 영국 디지털서비스청(GDS) 사무실 입구 모습.
“대담해져라.” “업무 시간에 밖으로 나가도 좋다.” “알림을 꺼둬도 좋다.” “실수해도 좋다.”
지난 2월7일 대형 금융사 사무실이 밀집한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 지구에 위치한 영국 지디에스(GDS, 디지털정부청) 사무실을 찾았다. 이 사무실에는 빅테크 기업이나 스타트업 사무실에 있을 법한 문구들이 곳곳에 적혀 있었다. 런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로비에선 직원들이 일하거나 쉴 수 있게 작은 테이블과 탁구대 등이 눈길을 끌었다. 천장에는 세계 각국 국기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한 관계자는 “지디에스 직원들의 다양한 출신 배경을 상징한다”고 귀띔했다.
지난 2월7일 방문한 영국 디지털서비스청(GDS) 사무실 내부 모습.
로비를 지나 업무 공간에 들어서자 길게 늘어선 업무용 책상들마다 엑셀의 열과 행처럼 알파벳과 숫자로 위치 정보가 표시돼 있었다. 다른 부서와 협업이 필요할 때 담당자를 찾아가 상의하기 쉬운 구조였다. 회의실도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놓인 방과 빈백(Bean Bag·쿠션처럼 생긴 소파) 몇 개 놓인 방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모양으로 마련돼 있었다.
영국의 디지털 정부 서비스 설계와 운영을 총괄하는 총리실 산하 조직인 지디에스는 사무실 외양만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도 정부 조직보다 스타트업에 가깝다. 지디에스는 ‘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핵심 원칙 삼아, 정식 서비스 배포 전후로 다양한 규모로 서비스의 사용성을 검증해 가며 내용과 디자인을 개선한다. 이미 배포한 서비스이더라도 시민들의 의견이나 이용 행태를 반영해 대폭 업데이트하는 경우도 잦다.
크리스틴 벨라미 지디에스 디렉터는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당시, 구글 검색엔진에 ‘여왕 조문하는 방법’, ‘장례식 날 임시공휴일 지정 여부’ 등 키워드 검색량이 치솟은 것을 보고, ‘거브닷유케이’(GOV.UK) 누리집에 관련 정보를 재빠르게 추가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7일 찾은 영국 디지털서비스청(GDS) 사무실에 ‘대담해져라, 우리는 함께 정부를 혁신하고 있다’, ‘실수해도 괜찮다’ 등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걸려 있다.
지디에스는 개발자가 적거나 없는 중앙·지방 정부 조직을 위해 누리집 프로토타입 툴킷(Tool Kit·제작 도구)을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이 툴킷을 이용하면 민간 기업에 외주를 맡기지 않고도 기존에 입력한 정보를 자동으로 불러오고, 주관식보다 객관식으로 답변을 요구하는 등 디지털 공공 서비스 설계 원칙을 만족하는 누리집을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
벨라미 디렉터는 “디지털 전문가가 없는 정부 조직의 경우 누리집보다 피디에프(pdf)같은 문서 형태로 서비스를 배포하는 게 더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접근성 측면에서 큰 후퇴를 낳는다. 특히 시력, 인지 능력, 신경 등에 장애가 있는 이용자들은 문서 형태의 서류 빈칸을 채워넣는 데 큰 어려움을 겪기에, (접근성 향상 도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누리집 형태의 서비스 배포를 권장한다”고 말했다.
지디에스는 개발자가 없거나 적은 정부 조직도 손쉽게 서비스를 디지털화 할 수 있도록 누리집 프로토타입 툴킷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지디에스 누리집 갈무리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에스토니아는 경제소통부 산하에 최고정보화책임자(CIO, Chief Information Officer)를 두고, 여러 정부 부처 서비스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고 있다. 영국 지디에스의 프로토타입 툴킷과 유사한 디지털 공공 서비스 개발 툴킷을 배포했다. 지난 2월1일 만난 조엘 코츠바 에스토니아 경제소통부 최고정보화책임자실 서비스디자인책임은 “많은 조직이 개발 과정에 이용자를 참여시키지 않는데, 그 과정을 수월하게 하는 실용적 툴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이 툴킷은 오픈소스로 개방돼 있어 정부 조직뿐 아니라 민간 기업도 가져다 쓸 수 있다.
덴마크는 공공 서비스 디지털화 과정에서 민간 기업들의 솔루션을 적극 활용한다. 디지털 전환 초기인 1970∼80년대에는 공기업 한 곳이 모든 디지털 서비스 솔루션과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를 구축해 중앙·지방정부에 납품했다. 1990∼2000년대부터 이를 일부 민영화해, 여러 공급업체끼리 경쟁하며 혁신적인 솔루션을 내놓도록 유도했다. 이어 2010년대 들어서는 재무부와 디지털청이 주도해 만든 디지털화 전략에 따라, 중앙·지방정부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솔루션을 민간 기업들이 프로젝트 단위로 빠르게 구축하는 민관협력 방식으로 전환했다.
지난 2월3일 만난 야곱 회퍼 라슨 덴마크 산업연맹 수석 컨설턴트는 “공기업 독점으로 혁신이 정체돼 있던 과거와 달리 더 많은 공공 자금이 민간으로 흘러들어가 여러 기업이 정부 운영에 기여하는 동시에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런던·탈린·코펜하겐/글·사진 정인선 기자
r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