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연구진이 화석의 DNA 보존 방식에 착안해, 데이터를 DNA로 저장하고 복원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www.ethz.ch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쉽게 기록하고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장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은 게 단점이다. 플로피 디스크(FD), USB는 길어야 10년이고 CD롬 DVD 같은 광디스크는 수십년, 아무리 보관을 잘해도 100년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저장매체들의 물리적 특성이 변질되기 때문이다. 반면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 보관되는 아날로그 정보는 500년 이상 살아남는다. 잘만 보관하면 천년이 넘게 기록을 보전할 수도 있다. 고대 파피루스 종이는 실제 2천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기록을 온전히 보존한 채 발견되고 있다. 첨단기술의 결과물인 디지털 기록의 저장수명이 오히려 옛날 방식인 아날로그에 크게 못미치는 것이다.
디지털 기록은 또 누구나 펼치면 읽을 수 있는 아날로그 기록과 달리, 각각의 독특한 저장 방식이 있어서 이걸 풀어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인터넷의 근간인 TCP/IP 프로토콜을 개발해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빈트 서프(Vint Cerf) 구글 부사장은 지난 2월13일 미국 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서 “미래엔 현재의 디지털 기록을 못 읽을 수도 있다”며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호환성 문제가 불거져 각 저장매체에 담긴 데이터를 읽어내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저장 수명만 생각한다면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게 좋을까? 하지만 아날로그 기록은 활용도에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 활용되지 못하는 정보는 사장된 정보나 마찬가지다. 영구적인 기록 저장 방법을 찾아나선 과학자들의 눈에 들어온 저장장치가 바로 DNA다. DNA는 기존 디지털 저장매체에 비해 저장 용량과 수명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탁월한 능력을 자랑한다. 우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설계도는 이 작은 DNA에 특정한 형태로 암호화돼 있다. DNA에 저장된 암호 정보에 따라 생명체는 생장성쇠의 복잡다단한 일생을 단계적으로 밟아나간다.
디지털 저장장치 수명 비교 표. http://www.code42.com/crashplan/medialifespan
화석 보존 방식 응용해 저장-복원 실험 성공
생명체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DNA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을까? 과학 전문지 <뉴 사이언티스트>에 따르면 1그램의 DNA는 이론상 455엑사바이트(1엑사바이트=10억기가바이트)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이는 현재 구글과 페이스북, 그리고 다른 모든 IT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를 합치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클라우드 컴퓨팅 업체인 EMC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동안 생겨난 데이터 총량은 1.8제타바이트(1제타바이트=1조기가바이트)다. 이를 DNA에 저장한다면 4그램의 DNA 하드 드라이브만 있으면 된다.
DNA 저장이란 어떤 방식의 저장일까? 네 가지 형태의 DNA 염기를 0과 1로 치환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 가지 염기 중 A(아데닌)는 C(시토신)와, G(구아닌)는 T(티민)와 각각 결합하는데, A와 C는 0으로, G와 T는 1로 설정한다. 지난 2012년 하버드대 연구진은 이런 방식으로 5만3천개의 단어, 11개의 그림, 하나의 컴퓨터프로그램을 포함한 책 한 권을 DNA에 저장한 적이 있다. 이는 5.27메가바이트의 용량이다. 하지만 연구진은 이 정보를 다시 원상태대로 복원하는 데서 문제에 부닥쳤다.
DNA를 이용한 데이터 저장과 해독 과정.onlinelibrary.wiley.com
로베르트 그라스(Robert Grass)를 비롯한 스위스연방공대 연구진이 최근 이 숙제를 해결함으로써 DNA 저장 방식에 새 길을 열었다. 연구진이 정보를 완벽하게 복원하기 위해 활용한 방법은 화석의 DNA 보존 방식이다. 화석 보존 방식의 핵심은 수분을 뽑아내는 것. 연구진은 DNA를 화석화한 뼈와 구조가 비슷한 실리카로 만든 캡슐에 집어넣었다. 이산화규소라고도 불리는 실리카는 유리의 주요 성분 가운데 하나이다. 석영 결정체를 연상하면 되겠다.
스위스 연구진이 저장 실험을 한 대상은 83킬로바이트 크기의 문서. 연구진은 이 정보를 4991개의 합성 DNA 조각에 담았다. 각 조각들은 158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이뤄져 있다. 뉴클레오티드란 당, 인산, 염기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DNA 사슬의 기본 구성 단위이다. 연구진은 이 문서의 DNA 버전을 일주일 동안 각각 섭씨 60도, 65도, 70도 환경에서 저장했다. 그 결과 세 가지 조건에서 모두 아무런 오류없이 기록이 보존됐다. 샘플을 회수했을 때 그들은 데이터를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시뮬레이션 결과 약 10도의 온도만 유지된다면 DNA 형태의 데이터는 20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그라스는 영하의 온도에서 저장한다면 아마도 100만년 이상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하 18도를 유지하고 있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종자저장고는 200만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다.
노르웨이 산악지대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200만년 이상 DNA를 저장할 수 있다. singularityhub.com
최초의 DNA 앨범 작업 중…10년 안 상업화 가능 예상
DNA 데이터 저장의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스위스 연구진이 83킬로바이트를 DNA로 저장하는 데는 1500달러(약 16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2011년에 생산된 데이터 총량 1.8제타바이트를 킬로바이트로 환산하면 약 200경(10의 18제곱) 킬로바이트다. 이 정보를 지금의 비용 수준에서 DNA로 저장하려면 세계 경제력을 다 쏟아부어도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DNA 데이터 저장은 방대한 용량과 긴 저장기간을 고려할 때 장점이 많은 방식이다. 좀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기술이 개선되면 비용은 점차 낮아질 것이다. 어떤 정보를 저장할지만 잘 가려낸다면 미래의 저장장치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4인조 록밴드 ‘OK GO’의 네번째 앨범을 DNA에 저장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스리람 코수리(Sriram Kosuri)는 미국의 4인조 록밴드 ‘OK GO’밴드의 네 번째 앨범을 DNA 버전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은 일종의 이벤트용이기는 하지만, 올 하반기 마무리돼 공개되면 세계 최초의 DNA 앨범으로 기록될 것이다.
DNA 정보 저장 연구는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을 뿐이다. 연구자들은 DNA 합성 기술이 좋아져 비용이 점차 줄어들면서 DNA 정보 저장이 이르면 10년 내에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때쯤이면 우리 손에 DNA칩이 쥐어져 있을까? 만약 그리 된다면 이제 우리 인간은 죽어서 이름만 남기는 게 아니라, ‘불멸의 기록’을 함께 남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곽노필 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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