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의 투자 대박인가’.
국외 투자에서 줄곧 ‘흑역사’를 써내려오던 에스케이텔레콤(SKT)이 오랜만에 활짝 웃음 짓고 있다. 투자한 지 1년 여 만에 투자금의 두 배가 넘는 평가 차익을 올리고 있어서다. 평가 차익보다 사업 제휴에 무게를 싣고 있다는 게 회사 쪽 공식 설명이나, ‘국외 투자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 겉으론 ‘표정 관리’…내부에선 투자 성공에 들떠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된 이스라엘 의료 장비 기업 나녹스의 상장 이후 4일(거래일 기준)이 지난 26일 종가는 28.7달러다. 상장가(18달러) 대비 60% 오른 가격이다. 에스케이텔레콤은 지난해 6월과 올해 6월 두 차례에 걸쳐 이 회사에 모두 2300만달러(약 270억원)를 투자해 약 261만 주를 확보하고 있다. 나녹스 특수관계인에 이어 2대 주주다. 나녹스의 상장 성공과 연이은 주가 상승으로 에스케이텔레콤의 투자 평가 차익은 이미 600억원이 넘는다. 미실현 이익이긴 해도 투자금의 두 배가 넘는 이익을 거둔 셈이다.
박정호 에스케이텔레콤 사장. 에스케이텔레콤 제공
회사는 겉으로는 ‘표정 관리’에 나섰다. 에스케이텔레콤의 핵심 관계자는 <한겨레>에 “사업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며 전략 투자를 한 것이라 평가 차익에는 관심이 없다. (나녹스의) 주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며 “우선 나녹스의 제품에 장착되는 반도체 생산공장(팹)을 국내에 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나녹스와는 5세대(5G) 이동통신 기반 클라우드 서비스와 인공지능(AI) 기술 활용과 관련해 다양한 공동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사실상 첫 국외 투자 성공 사례를 만들어낸 것에 들뜬 표정이 역력하다. 이 회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사실 그동안 해외 투자 건마다 실패했잖냐. 나녹스 성공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자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 ‘SK=내수기업’ 이미지 벗고 싶었던 총수
지금까지 에스케이텔레콤의 국외 투자 성적은 초라한 편이었다. 2001년 베트남 이동통신 시장(에스폰)에 진출했다가 빈 손으로 되돌아왔고, 2006년엔 미국 가상이동통신망(MVNO) 시장(힐리오)에 뛰어들었다가 큰 손실을 봤다. 2007년 중국 차이나유니콤에 10억달러 규모의 전략 투자를 한 것도 실패 사례로 꼽힌다. 브라질 이동통신 시장 진출도 쓴 맛만 봤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이 회사의 전직 임원은 “직접 손실만도 6천억~7천억원에 이르고, 기회비용(같은 금액을 다른 곳에 투자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이익)까지 포함하면 실패 대가는 1조원을 훌쩍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녹스가 개발해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 절차를 밟고 있는 디지털 방식 엑스-레이 촬영 장비 ‘나녹스 아크’. 가운데 원 모양의 장치에 디지털 방사선을 발사하는 반도체 모듈이 설치돼 있다. 촬영 결과는 이동통신 기반 클라우드 서버로 전송돼 뒤처리 과정을 거치도록 설계돼 있다. 에스케이텔레콤 제공
에스케이텔레콤의 국외 투자가 가속화한 계기는 2000년대 초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이 에스케이글로벌의 1조5천억원 분식회계 건으로 검찰수사를 받고 구속되면서다. 에스케이텔레콤 뿐만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국외 투자와 수출에 힘을 쏟았다. 3개월마다 진행되는 분기 실적설명회(IR)에서도 국외 매출 비중을 유독 강조했다. 에스케이그룹 계열사의 한 전직 임원은 “최 회장은 분식회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분식회계는 우리만 한 게 아닐 텐데 왜 내가 가장 먼저 수사를 받게 됐냐’고 물었고, ‘(정부가)에스케이를 내수기업이라고 판단해 대외 신인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것 같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최 회장은) 에스케이도 수출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되면서 해외 투자와 수출을 독려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 박정호 사장 취임으로 ‘2차 국외 투자 붐’
하지만 이후 국외 투자 실패가 잇따르자 에스케이텔레콤도 한동안 전략 투자에 신중한 자세로 돌아섰다. 국외 투자가 재개된 건 박정호 사장이 ‘뉴 정보통신기술(ICT) 회사 도약’ 경영전략을 제시하면서부터다. 박 사장은 2017년 1월 취임 당시 “‘나, 에스케이텔레콤이야!’ 허풍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 글로벌 탑 플레이어들과 손잡아야 한다. 에스케이텔레콤의 장점과 상대방 장점을 결합시켜 함께 시너지효과를 내는 투자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박 사장 취임 이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전략 투자가 잇따르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양자 방식 암호기술 전문업체 아이디큐(IDQ)에 투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디큐 양자암호기술은 삼성전자 스마트폰(갤럭시A 퀀텀)에 채택됐다.
국내 업체와 과감하게 손 잡는 일도 부쩍 늘었다. 대표적인 게 모바일 음원·선물함·내비 등에서 충돌하면서 사업적으로 마치 ‘원수’처럼 지내던 카카오와의 전략적 제휴 사례다. 에스케이텔레콤은 박 사장 취임 뒤 카카오와 2천억원대의 자사주를 교환하는 수준의 ‘피를 나누는’ 전략적 제휴를 맺었고, 이를 바탕으로 에스케이텔레콤의 온라인쇼핑몰 자회사 11번가에서 카카오페이를 사용하고, 카카오톡에서 에스케이텔레콤 이동통신 판매를 하는 상생효과를 내고 있다. 에스케이텔레콤은 이밖에도 현대자동차 등과 공동으로 자율주행 스타트업 ‘코드42’에 투자했다.
김재섭 선임기자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