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크라상 등을 보유한 기업집단 에스피시(SPC)가 총수일가 소유 기업을 계열사간 거래 중간에 끼워 넣어 하는 일 없이 돈만 챙기는 ‘통행세 거래’가 드러나 수백억원대 과징금을 내게 됐다. 이를 주도한 허영인 에스피시그룹 회장과 조상호 전 그룹총괄 사장, 현 황재복 파리크라상 대표 등 3명은 검찰에 고발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9일 기업집단 에스피시가 2세들의 경영권 승계 등을 목적으로 계열사를 동원해 에스피시삼립(삼립)에 5년간 5천억원 가까운 매출을 부당지원한 혐의로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647억원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부당내부거래 과징금으로는 역대 최고액이다.
‘통행세 거래’로 부당이익을 챙긴 업체는 허 회장과 두 아들이 사실상 소유한 삼립이다. 에스피시 계열사인 밀가루업체 밀다원은 지난 2013년부터 파리크라상, 에스피엘, 비알코리아에 원재료를 공급하면서 중개업자 구실로 삼립을 거쳐야했다. 예를 들어, 밀다원이 단가 740원짜리 밀가루를 삼립에 형식상 공급하면, 삼립은 파리크라상에 그대로 물건을 건네는 것만으로 39원의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다. 2년 뒤부터는 달걀알맹이인 액란 같은 제빵재료와 완제품 빵을 공급하는 또다른 계열사 에그팜, 샌드팜 등도 같은 방식으로 삼립을 거쳐 거래가 이뤄졌다. 이런 방식으로 삼립은 2013년 9월부터 5년간 밀다원에서 2083억원, 2015년부터 3년간 에그팜·그릭슈바인 등에 2812억원 등 5천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삼립은 가격결정, 재고관리, 영업 등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계열사간 거래 사이에 총수일가 기업의 이름만 올려놓고, 별다른 역할없이 이른바 ‘통행세’를 받아 챙긴 것이다. 통행세는 중소기업의 경쟁기반을 무너뜨리고 총수일가에 부당한 이익을 주는 행위로, 공정거래법이 엄격하게 금지하는 사안이다.
아울러 에스피시는 2013년 당시 양산빵 인지도 1위였던 계열사 ‘샤니’의 상표권을 삼립에 8년간 무상으로 쓰도록 하고, 0.5%에 불과한 영업이익률로 양산빵을 삼립에 공급하도록 샤니에 지시했던 사실도 확인됐다. 또 파리크라상과 샤니가 보유하던 밀다원의 주식을 정상가격(404원)의 60%에 불과한 수준에 삼립에 넘겨 20억여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통행세 거래를 포함해 2011년 이후 7년간 삼립이 챙긴 부당이익이 414억원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허영인 회장이 계열사 주간경영회의에서 삼립이 실제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지시하는 등 부당내부거래를 직접 주도한 정황도 드러났다. 또 허 회장은 지난 2017년 미스터피자의 ‘치즈 통행세’로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삼립의 통행세 품목 일부를 직거래로 바꾸라는 지시도 내렸던 것으로 공정위는 판단했다. 공정위는 에스피시가 총수일가의 지배력 유지와 2세 경영권 승계를 위해 계열사를 동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파리크라상은 허 회장 가족이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고, 삼립은 지난 3월 말 현재 파리크라상과 허 회장 가족이 73.6% 지분을 갖고 있다.
자료: 공정거래위원회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공정위는 지시를 내린 허 회장과 함께 이를 실행한 조상호 전 그룹총괄 사장, 현 황재복 파리크라상 대표 등 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정진욱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은 “이번 조처는 대기업집단만이 아니라 중견기업집단의 부당내부 지원거래로 중소기업의 경쟁 자체를 봉쇄하는 행위를 엄정하게 처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에스피시쪽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수직계열화 전략이라고 소명했는데 과도한 처분이 이뤄졌다”며 “공정위 의결서를 검토해 대응방침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석재 김윤주 기자
forchis@hani.co.kr
미스터피자·하이트진로·한진…총수들 이익 빼돌리기 복마전
끊이지 않는 총수일가 통행세 논란
계열사 간 일감몰아주기의 한 유형인 ‘통행세 거래’는 총수 일가의 편법대물림 수단의 하나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왔다.
2017년 미스터피자를 운영하는 엠피그룹 정우현 당시 회장이 가맹점 치즈 공급에 친인척이 운영하는 중간업체를 끼워 넣어 50억원대 이익을 빼돌린 이른바 ‘치즈 통행세’ 사례가 대표적이다. 통행세를 거부하고 프랜차이즈에서 탈퇴하면 인근에 직영점을 내는 ‘보복 출점’ 행위까지 벌였다.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의 큰아들 박태영 부사장은 지난 2017년까지 자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계열사를 통해 맥주캔 제조·유통 과정에 ‘통행세’를 받았다는 혐의로 지난 5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8년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03년부터 5년간 대한항공 항공기 장비와 기내면세품을 구입하면서 개인소유 회사인 트리온무역을 끼워 통행세 196억원을 챙겼다가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최근엔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의 장남 김준영씨가 소유한 회사를 양계농장 약품공급 중간 단계에 끼워 넣어 공정위 조사를 받고 있다. 2014년에도 삼양식품이 전인장 회장 일가에 20년간 통행세를 챙겨주다가 공정위에 적발됐다.
통행세 거래 관련 명문화된 규제가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도입된 건 지난 2013년 7월이다. 그 이후 공정위의 감시망이 더 두터워졌지만 통행세 거래를 통한 총수 일가의 주머니 불리기 행위가 끊이지 않은 것이다. 이에 일부에선 좀 더 강화된 조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공정위 처분에 대한 기업과 법정 소송에서 ‘부당성 입증 책임’을 기업 쪽이 지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동화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간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부당거래 혐의를 받는 기업 쪽이 자사의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규정을 바꿔야 한다”며 “관련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