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공정경제 3법' 제·개정을 추진하면서 대기업 경영권 남용을 견제할 핵심 제도의 하나로 꼽았던 ‘집중투표제의 단계적 의무화’를 제외했다. ‘3%룰’과 함께 기업지배구조를 한단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제도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등 주요 정치권에서도 지지를 받아온 터라 국회 입법과정에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무부는 지난 8월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대주주의 전횡 방지, 소수주주의 권익 보호 등을 위해 기업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겠다”며 상법 개정을 통해 다중대표소송제 도입과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에 기업투명화를 위한 핵심 조항의 하나로 꼽혔던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빠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집중투표제는 기업이 2명 이상의 이사를 선출하는 과정에 주주들에게 ‘1주당 1의결권’이 아닌 ‘1주×선출이사수’ 만큼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예를 들어 기업이 동시에 이사 3명을 선출할 경우, 10주를 가진 주주는 3배(30개)의 의결권을 갖게 되고, 이를 특정 후보에 몰아줄 수 있다. 필요한 경우 이를 모두 한 후보에게만 줄 수 있어 ‘1주 1의결권 제도’에서 실질적인 이사 선임권한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소수주주들이 ‘거수기 이사회'를 막을 수단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재계가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기업들이 경영권 공격을 받을 경우 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논리로 강력 반대해온 제도이기도 하다.
1998년 상법 개정을 통해 집중투표제가 첫 도입됐지만, 의무 조항이 아니고 회사 정관으로 배제할 길을 터놔 의무조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꾸준이 제기됐다. 실제 지난해 상장사 가운데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이 4.5%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법무부 상사법무과 담당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20대 국회 때도 집중투표제를 포함한 상법 개정안을 냈지만, 다중표소송제와 ‘3%룰’에 집중투표제까지 쟁점이 많아지면서 결과적으로 개정안 전체가 통과되지 못했다”며 ”이번에는 관계 부처 협의와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수렴을 거쳐 집중투표제는 우선 과제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기업과 야당의 반발을 고려해 국회 문턱을 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앞서 법무부 전임 박상기 장관도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재계가 원하면 양보할 수 있다”며 집중투표제를 협상 대상의 하나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집중투표제는 여야 정치권이 이미 접점을 맞춘 제도여서 정부 입법안에서 개혁성이 오히려 후퇴를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제도는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자,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된 내용이다. 야당에서도 현재 김종인 국민의힘 위원장이 2016년 여야의원 121명 동의를 얻어 발의한 상법 개정안에 같은 내용을 포함시켰다. 정의당도 지난 20대 국회에서 당론에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포함했다. 정부 상법 개정안에 집중투표제가 빠지면서, 경제개혁 분야에서 여야의 공수가 뒤바뀌게 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여권 내부에서도 국회 법안 논의과정에서 집중투표제가 반드시 추가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박주민, 박용진 의원이 각각 정부 개정안과 별도로 집중투표제 단계적 의무화를 포함한 상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한 상태다. 박용진 의원은 입법제안서 등에서 “정부 개정안에 집중투표제가 빠진 것은 중요한 나사 하나 빠진채로 법안이 국회로 넘어 온 것”이라며 “이사 선임 과정에서 소수 주주의 의견을 보다 잘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집중투표제 방식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관으로 집중투표의 실시를 배제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을 삭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주민 의원의 경우, 아예 김종인 국민의힘 대표가 2016년 집중투표제 단계적 의무화를 포함한 상법 개정안을 그대로 가져와 재발의했다. 유력 대선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최근 “집중투표제 의무화 뿐 아니라 집중투표 청구 자격도 현재 발행주식의 3%이상 소유 주주 대신 의결권이 있는 모든 주주로 확대해야한다”며 더 강력한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상훈 경제개혁연대 부소장(변호사)은 <한겨레>에 “집중투표제는 회사나 지배주주가 아닌 주주들이 제안하는 이사 후보자의 선임 가능성을 높여 독립적 이사회 구성을 가능하도록 하는 수단 중 하나”라며 “현행 제도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점도 개선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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