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청사 앞 시위에서 한 시민이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의 폐기에 찬성한 대법관 5명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팻말을 들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3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의 육중한 청사를 메가폰 소리와 함성이 뒤흔들었다.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49년 만에 깨는 대법원 판결 초안을 <폴리티코>가 공개하면서 전날 밤 시작된 항의 시위가 종일 이어진 것이다.
미국 땅 반대편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왔다는 여성은 메가폰을 잡고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외쳤다. 한 중년 여성은 기자에게 “시민 건강권에 위배”되는 “극우의 오만을 보여준 판단”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시민 토냐 하우도 “내 권리를 지키러 나왔다”며 “세계를 백인, 남성, 기독교 근본주의 중심으로 끌고가려는 정치적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뉴욕·시카고·애틀랜타 등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도 시위가 진행됐다.
미국 대법원이 임신중지 불법화 진영 손을 들어주면서 순식간에 정치·사회적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빨려들어갔다.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나서 아직 선고되지도 않은 판단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 문제는 11월 중간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내어 “여성들의 선택권은 기본적인 것이며, 이 판례(‘로 대 웨이드’)는 거의 50년간 이 땅에서 법으로 작동했다”며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기자들에게는 “이번 판단이 유지되면 정말 과격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11월에 여성의 선택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뽑아야 한다”며 사안을 재빨리 선거 쟁점으로 만들었다. 그는 “우리는 ‘로 대 웨이드’ 판례의 성문화를 위해 더 많은 상원의원이 필요하고, 하원에서도 선택권을 옹호하는 다수당이 필요하다”고 했다. 판례가 깨지면 입법으로 권리를 보장해야 하니까 민주당에 표를 달라는 말이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워싱턴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어찌 그들이 여성한테 몸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한단 말이냐”고 했다.
민주당 쪽이 이번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정치·사회적 파장이 크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지난해 <시비에스>(CBS) 여론조사에서 기존 판례 유지 의견(62%)이 폐기(38%)를 상당히 앞섰다. 그런데도 대법관 9명 중 폐기 의견이 적어도 5명에 이른 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법원 보수화 전략이 먹힌 측면도 있다. 그가 지명한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모두 기존 판례를 버리자는 다수의견 편에 섰다. <폴리티코>가 보도한 다수의견 초안은, 임신중지 처벌은 위헌이라며 22~24주까지 여성의 선택권을 인정한 1973년 판례를 “터무니없이 잘못됐다”고 평가했다. 헌법이 임신중지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것은 잘못이라는 판단이다.
이런 단순한 해석을 접한 진보 진영에서는 보수색이 지나치게 강한 대법원에서 시민권 확장 판례들이 줄줄이 희생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동성 결혼 합법화 등 사생활의 자유를 확대한 판례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했다.
공화당이 이끄는 주정부들은 대법원 판단에 고무돼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이날 케빈 스팃 오클라호마 주지사는 임신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6주 뒤의 모든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입법이 끝났거나 진행 중인 주들을 비롯해 남부와 중서부를 중심으로 전체 50개 주 중 20개 주 이상이 임신중지 불법화 법률을 갖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곤란한 것은 초유의 판결 초고 유출 사태에다, 그 내용에 대한 반발에 직면한 대법원이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성명을 내어 보도된 초안이 실재한다고 인정했다. 그는 “충격적 위반 행위”에 책임을 묻기 위해 유출 경위를 조사하라고 법원 경찰대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은 높던 권위가 실추되고, 분쟁 해결 기관이 아니라 혼란 촉발 기관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썼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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