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중국을 견제하려고 내건 거액의 보조금을 받으려면 아동 돌봄 시설을 설치하고 초과 이윤은 정부와 나눠야 한다는 지침을 마련했다. 삼성전자도 신청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조금을 두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일석삼조 내지 일석사조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28일부터 기업들한테 반도체 투자 보조금 수급 의향서를 받기로 한 미국 상무부가 여성 취업 확대와 초과 이윤 등에 관한 지침을 마련했다고 27일 보도했다. 지난해 발효된 ‘칩과 과학법’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에 390억달러 등 5년간 527억달러(약 69조원)의 보조금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개별 기업과의 협상을 통해 보조금 지급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을 밝힌 상태다. 이 과정에서 1억5천만달러 이상 보조금을 희망하는 업체에는 높은 수준의 아동 돌봄 시설 설치를 요구하기로 했다. 또 생산시설 근처에 아동 돌봄 시설을 설치하지 않으려면 돌봄 수당을 실질적 수준으로 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기로 했다.
아동 돌봄 시설 설치 요구는 보조금을 여성 취업 증대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현재 미국 제조업 인력 중 여성은 약 30%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반도체 업체들은 “여성들을 끌어들이고, 훈련시키고, 작업에 투입하고, 계속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고, 아동 돌봄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상무부는 또 자사주 매입 자제를 보조금 지급 결정에 유리한 요소로 반영하고, 초과 이윤은 연방정부에 일부를 지급하는 것을 약속받겠다고 했다. 이런 조건들은 기업 보조금 지급에서 전례를 찾기 어렵다.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파동 속에 막대한 이윤을 챙긴 석유 기업 등이 주가를 띄우려고 거액을 자사주 매입에 쓰는 것에 반감을 표시해왔다. 상무부는 초과 이윤 일부 환수는 정부가 실제로 이윤을 건네받으려는 것보다는 과장된 손실 예측을 막으려는 목적이 크다고 설명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투자한다는 점을 내세워 보조금 지급 대상이 되거나 보조금을 더 받고서는 막대한 이윤을 누린다면 제재를 가하겠다는 얘기다.
이런 보도 내용까지 종합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보조금을 국내 산업 육성, 중국 반도체 산업 억제, 아동 돌봄 확대와 여성 일자리 확충, 초과 이윤 남용 견제 등 다목적으로 쓰려는 의도가 분명해진다. 이는 산업 정책을 미국 제조업 부흥과 함께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서의 승리와 불평등 축소까지 이어지는 거창한 목표에 동원하려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아동 돌봄 강화에 수천억달러를 투입하는 법안을 추진했으나 의회에서는 민주당 상원의원들까지 호응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는 반도체 보조금 정책은 “경제와 국가 안보적 목적을 위해 미국 재계를 굽히게 만들려는 연방정부의 공격적인 시도”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보조금 수급의 주요 조건인 중국에 대한 10년간 투자 제한은 미국 업체들보다는 중국에 대규모 생산시설이 있는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건설하는 공장에 대해 보조금을 신청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에 거액을 투자하기로 한 미국 인텔과 대만 티에스엠시(TSMC)도 보조금 수급 경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미국 반도체 업계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내건 조건들이 까다로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워싱턴/ 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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