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남북 고위급회담 중지(연기) 통보와 ‘북-미 정상회담 재고 가능성’ 언급에 대해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계속 준비’ 방침을 밝히면서도, 큰 당혹감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16일 아침(현지시각)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으로 여전히 희망한다고 밝혔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도 회담을 계속 준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단 판을 흩트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샌더스 대변인은 북한의 강경한 태도에 자극 받은 듯 ‘최대의 압박’이라는 말을 다시 꺼내기도 했다. 그는 “만약 그들이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는 말까지 했다. 재개된 ‘말의 전쟁’에서 지지 않겠다는 식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전망을 선전하면서 고무된 모습을 보여온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급변한 태도에 당황하고 있다. 백악관은 북한의 발표가 전해진 직후인 15일 오후 2시께 국가안보회의(NSC)와 국방부, 국무부 등 관련 부처 관계자들을 모아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시엔엔>(CNN) 방송이 보도했다. 북한이 ‘6월12일 싱가포르’로 확정된 북-미 정상회담의 취소 가능성까지 언급한 만큼 사태를 심각히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시엔엔>은 또 “백악관이 북의 통보로 허를 찔렸다”는 백악관 참모의 발언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의 내부 기류를 전했다. <뉴욕 타임스>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에 앞서 단순히 가식적 태도를 취한 것인지, 심각한 새로운 장애물을 세운 것인지를 둘러싸고 백악관 내부의 논쟁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전용 헬기 ‘마린 원’을 탑승하러 가는 길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답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경고가 판을 깨려는 의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의 한 소식통은 <폭스 뉴스>에 “북한이 원래 하는 방식”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제기한 불만 사항이 회담 의제의 근본 쟁점에 관한 것이어서 심각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핵심 쟁점은 이른바 ‘리비아 모델’과 그 핵심 내용인 ‘선폐기 후보상’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3일 “북한의 기존 핵무기를 폐기해 테네시주의 오크리지로 가져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최대의 압박’ 정책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북한은 16일 담화에서 “리비아를 핵보유국인 우리와 대비하는 것 자체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밝히는 등 리비아 모델에 큰 거부감을 밝혔다. 북한은 단계적·동시적 접근을 주장하고 있어, ‘핵무기 이전’을 하더라도 그에 앞서 미국의 성의 있는 신뢰 구축 조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뿐 아니라 모든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등으로 의제를 확대할지도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결정해야 할 중요 현안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13일 방송에 나와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위협 해소가 일차적인 목표임을 내비친 반면, 볼턴 보좌관은 탄도미사일·생화학무기는 물론 일본인 및 한국인 납북자 문제까지 정상회담 의제에 올릴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특히 이번 담화가 볼턴 보좌관을 콕 찍어 비난한 점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북한이 볼턴 보좌관을 회담 진행의 심각한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면 북-미의 기 싸움은 길어질 수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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