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AFP 연합뉴스
다음달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취소로 향후 상당 기간 한반도 정세에 후폭풍이 예상된다. 산이 높았던 만큼 골도 깊어질 수 있다. 북-미 간 ‘안내 역할’을 담당했던 한국 정부도 당분간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면서 정세 관리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발표는 다소 전격적으로 보인다. 지난 16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정상회담 재고려 가능성’ 발언으로 출렁이던 북-미 회담 분위기는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23일 한-미 정상회담)로 진정되는 듯 보였다. 문 대통령과의 단독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도 정상회담이 취소·연기될 가능성을 내보였지만, 회담 뒤엔 다시 낙관적인 기조가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각) 방송된 <폭스 뉴스>의 ‘폭스 앤 프렌즈’에서 북한 비핵화 방식과 관련해, “물리적으로 단계적(phase-in)으로 하는 게 조금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비핵화 방식과 관련해 북한과 절충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단계적’이란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간적으로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24일 담화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을 문제 삼으며 “조-미(북-미) 수뇌 회담 재고려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고 한 게 미국 행정부 내부의 비관적 분위기를 촉발했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강경 발언에 대해 나름 ‘성의 표시’를 했는데도, 북한이 계속 압박 공세를 하고 있는 것에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 상당한 반발 여론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추진 의욕에도 불구하고 참모들 입장에선 미국 내 여론을 의식해 북한에 지나친 양보를 하는 모양새에 대해 부담을 가졌을 수 있다.
내용적으로는 김계관 제1부상과 최선희 부상의 담화를 보면, 미국 행정부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의심을 가졌을 수 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비핵화와 관련해 미국의 기대치만큼 결과가 나올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이것이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메랑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시엔엔>(CNN) 방송은 23일 트럼프 행정부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과의 고위급 회담을 추가로 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이라는 확약을 받기를 원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회담 준비에 관여하는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방송에 “북-미 정상회담이 유익한 회담이 될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논의할 것들에 대한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원하는 수준으로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조처를 내놓을지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분위기가 행정부 내부에 있었다는 뜻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에 대해 “미국은 북-미 회담의 성공 가능성이 작다고 봤다”고 말했다. 또 최근 며칠간 싱가포르 회담 준비를 위해 북한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동시에 미국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했다는 점은 향후 양국 간 불신을 심화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북한 입장에선 정상회담 자체를 지렛대로 삼아 ‘열매만 따먹었다’는 반발이 나올 수 있다. 미국 시민권자인 억류자 3명을 북한이 석방한 뒤에 미국이 180도 입장을 선회한 것도 북한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특정하기는 어려워도 북-미 회담 논의가 재개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방식이 부동산 거래와 같은 특징을 갖고 있어, ‘가격만 맞으면’ 다시 협상을 할 여지가 남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취소 서한에서 “언젠가는 당신(김 위원장)을 만나기를 매우 기대한다”며 여지를 남겨놓았다.
북한 내부적으로도 경제개발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전략적 결단’을 내린 상황이어서, 한반도 정세 악화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부담스럽다. 다만, 남북관계는 상당히 유동적으로 됐고, ‘북-중 밀착’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북-미 간 70년 동안 쌓인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화보] 풍계리 취재단이 본 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