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시각) 탈레반 대원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스프레이로 지워진 미용실 광고판 앞을 총을 들고 지나가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마침내 20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탈레반은 15일(현지시각) 수도 카불을 장악하고 “전쟁이 끝났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날부터 탈출하려고 카불 국제공항에 몰려든 아프간 국민들의 모습은 공포와 혼돈 그 자체였다. 지난 5월3일 미국이 아프간 철군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동안 아프간 상황이 어떠했기에 또다시 탈레반이 재집권할 수 있었을까?
아프간 전쟁은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었다. 20년간 미군 2448명이 사망했으며 1조달러(약 1176조원)가 넘는 전비가 소요되었다. 물론 아프간 현지인의 사망자와 피해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전쟁의 참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향후 정확한 통계수치가 필요할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았으며, 미군 철수가 국익을 위한 결단이라고 항변했지만 실패한 전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 전쟁에서 실패했는가? 먼저 미국의 전쟁 목적과 의도는 정당하지 못했다. 미국의 공격은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조직을 넘기라는 제안을 탈레반 정권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신병 인도를 거부했다고 공격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고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9·11 테러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거나 협력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유엔 승인 없는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지지기반과 목표가 매우 다르다. 탈레반은 아프간인, 주로 파슈툰인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아프간에서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반면에 알카에다는 아랍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미국의 전쟁 의도는 친미 정권의 수립에 있었다.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반탈레반 세력인 북부 동맹과 연대했다. 북부 동맹은 1989년 소련군 철수 이후 나지불라 정권을 붕괴시키고 1992년 12월 탄생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과 관련된 조직이다. 반소련 저항조직이었던 무자헤딘 7개 단체가 연합해 랍바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이후 랍바니 연합조직 대 반랍바니 연합조직이 내전을 벌이다가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아프간 북부로 이동했다. 미국은 아프간인의 손으로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북부 동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북부 동맹은 사실상 탈레반 전복의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미국은 북부 동맹을 배제하고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시 정부의 수반으로 지명했다. 카르자이는 1996년부터 탈레반과 중앙아시아 가스(CENTGAS) 컨소시엄 협상에서 미국 에너지 회사 유노칼의 고문이자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과도 정부 수반을 거쳐 대통령(2004-2014)으로 당선되었다. 중앙아시아 가스 컨소시엄은 1996년 8월 유노칼, 델타 오일(사우디아라비아), 가즈프롬(러시아) 및 투르크멘로스가즈(Turkmenrosgaz: 투르크메니스탄)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송유관 협정을 체결했다. 1997년 5월 유노칼은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과 3자 협정을 체결했고 9월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이 탈레반에게 송유관 통과료를 15% 주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하자 탈레반이 크게 반발하면서 이 사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국의 실제 목적은 아프간에 친미 정권을 수립해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부 동맹을 배제한 미국의 또다른 목적은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2001년 가을 CIA와 이슬람혁명수비대 장교가 만나서 북부 동맹 지원을 논의했고 이란을 통해 자금과 무기가 북부 동맹의 지도자 랍바니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과거 미국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통해 탈레반을 지원했던 똑같은 방식이었다. 그 당시 이란 쪽 대표가 2020년 1월3일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암살당한 카셈 솔레이마니 이슬람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었다.
또한 미국의 아프간 국가 건설의 목표와 방향도 잘못되었다. 미국은 아프간에 강력한 친미 중앙정부를 수립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미국은 북부 동맹이 소수 민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수파인 파슈툰인(42~45%)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프간은 다민족 국가로 파슈툰인 이외에도 타지크인(25-27%), 하자라인(8~9%), 우즈벡인(8~9%), 투르크멘인(3%), 발루치인(2%)으로 구성되었다. 북부 동맹의 중심세력은 타지크인, 하자라인, 우즈벡인이다.
하지만 정통성도 없고 지지기반도 취약한 파슈툰인 지도자인 카르자이와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2014~2021)은 부패와 무능의 상징이었고 아프간 국민들은 그들을 카불 시장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과 협상 과정에서 해외로 도주해 평화적인 정권 교체와 과도 정부의 수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친미 중앙정부는 아프간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해관계와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미국의 관심사도 친미 정권인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된다. 아프간 국민들은 비무슬림 이방인에 의존하는 친미 중앙정부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미군의 강압적이고 무례한 정책과 태도는 탈레반 해방의 구원자가 아니라 또다른 아프간의 점령자라는 시각으로 바뀌었고 미군의 공습에 의한 민간인 사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반미 감정은 점차 확산되었다. 특히, 2009년 5월 아프간 서부 파라주에서 미군의 오폭으로 인해 1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지방과 시골에서는 반미 운동으로 격화되었고 정통 탈레반의 주위에 다양한 민족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가 결합하면서 신탈레반이 탄생하게 되었다.
화력과 병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아프간 정부군이 탈레반을 상대로 교전 한번 없이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군의 부패와 무능을 언급하기도 한다. 탈레반은 정부군 30만명에 견줘 5분의 1 규모에 불과했지만 정부군의 실제 병력은 매우 적었고 대다수가 유령 군인이라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보다 분명한 사실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위해 어떤 군인도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은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마무리도 잘못되었다.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으로 다른 국가와 민족을 지배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잘못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쟁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 주둔 미군을 9·11 테러 20주년인 9월11일 이전에 완전히 철수하겠다고 밝혔다가 7월 8일 기자회견을 통해 8월 31일로 변경했다. 아프간의 험난한 지형 및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아프간의 겨울철에는 사실상 휴전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 이벤트를 위한 철군 시점 오판으로 인해 아프간의 혼란을 가증시켰다.
탈레반 재집권 이후 중앙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치고 있고 주변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미군이 떠난 아프가니스탄을 중국과 러시아는 표면적으로는 환영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복잡하다. 이는 미국 세계전략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는 향후 아프간 사태가 자국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고 탈레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서방 국가들과 달리 아프간 대사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간을 침공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 명분은 친소련 아프간 인민민주당 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 목적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국가로 이슬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아프간의 대중 봉기를 단순히 부족 갈등으로 규정하는 정책 오류를 범해 아프간의 덫에 빠졌고 이는 소련 붕괴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은 소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아프가니스탄은 약 76㎞의 국경선을 맞대고 있고 탈레반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을 지원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 지원을 명분으로 탈레반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17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 미군이 배치되어 있다. 카불/로이터 연합뉴스
터키와 이란도 아프간 대사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상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상황과 입장은 다르다. 터키는 탈레반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로 환영한다면서 모든 정파와도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통해 아프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움직이고 있다. 이란은 아프간 사태를 미국의 군사적 패배로 규정하면서 아프간의 안정과 회복을 돕겠다고 밝혔지만 탈레반의 재집권에 긴장하는 분위기다. 이는 탈레반이 시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시아파인 하자라인을 대규모로 학살했었고,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 재집권 이후 아프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슬람 에미리트(토후국)로 복귀할지 아니면 이슬람 공화국을 유지할지 크게 두 가지 갈림길에 직면해 있다. 탈레반은 공식석상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이는 과거로의 복귀를 상징하지만 아프간 재건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다양한 정파를 내각에 참여시켜 개방적인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과거 탈레반이 집권해 보여준 여성 차별, 우상숭배란 이유로 사진 촬영 금지와 세계문화유산 바미안 석불 파괴 등 충격적인 정책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우려와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및 파키스탄은 탈레반 정부를 공식 인정했고 미국은 탈레반의 이슬람법 조치에 대해서 반대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침묵했다. 이제는 국제사회가 하나된 목소리로 아프간 사태를 대처해야만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아프간 정부가 출범할 수 있다.
아프간의 현실과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고 2007년 아프간 피랍 사태를 겪었던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슬람주의자도 아니고 탈레반의 이슬람 극단주의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탈레반의 재집권이라는 현실과 아프간의 역사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흔히 아프간을 ‘아시아의 각축장’, ‘침략자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이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과 분쟁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용어이다. 아프간의 비극은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 문화와 종교적 교조주의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아프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단지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