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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폭발, 코로나19, 식량부족…“레바논은 지금 지옥”

등록 2020-09-05 09:28수정 2020-09-05 09:30

[토요판] 인터뷰
재한 레바논인들이 말하는 ‘폭발 이후’

폭발 오리무중, 코로나19 급증
종교·성별 달라도 개혁 한목소리
“내각사퇴 부족, 집권세력 물러나야”

“폭발사건, 부패·무능 누적 결과
질산암모늄 진상조사 신뢰 못해”
유사사건 터질까 트라우마 계속
“국제원조도 정부에 주지 말라”
최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폭발사건과 그 뒤를 이은 대규모 시위, 코로나19 사태 등에 대해 사메르 삼훈, 린다 쉐라라, 루디 카람(왼쪽부터)씨가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이태원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최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폭발사건과 그 뒤를 이은 대규모 시위, 코로나19 사태 등에 대해 사메르 삼훈, 린다 쉐라라, 루디 카람(왼쪽부터)씨가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이태원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중동의 파리라고 불리던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폭발이 만든 140m의 구덩이가 남긴 상처는 깊고 넓었다. <한겨레>가 만난 레바논인 세명은 정부도, 언론도 믿지 못했다. 불신은 불안으로 자라났다. 끝없는 지옥에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다.” 좌담회가 끝나고 린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서”라고 했다.

“지옥이 따로 없다. 레바논이 지옥이다.”

린다는 여동생 둘과 부모님이 사는 베이루트를 떠올리면 쉽게 흥분한다. 그는 지난달 21일 서울 이태원 인근 한 카페에 모인 레바논인 셋 중 한명이다. 함께 만난 사메르도 마찬가지다. “가족 걱정이 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달 3일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의 질산암모늄 폭발 사건이 터지고 한 달이 넘었지만 진상조사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이 사고로 확인된 사망자만 200명을 넘었고, 7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레바논 정부는 피해액을 150억달러(약 17조7천억원)로 추산한다. 집을 잃은 사람들이 30만명이다.

헤즈볼라 통치 ‘파산’ 상태

결국 하산 디압 총리가 지난달 10일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대통령, 국회의장 등 사실상 모든 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로 번져가고 있다. 지난 7월 총리와 대통령이 질산암모늄의 위험성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는 더욱 커졌다. 정부의 진상조사를 믿는 이들은 별로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뒤 레바논을 통치했던 프랑스가 떠난 1943년 이후로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교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가 나눠 맡았다. 우여곡절 끝에 2018년 총선을 통해 지금 레바논은 시아파 무장조직 헤즈볼라 출신들이 이끌고 있지만, 헤즈볼라의 통치는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고 있다. 몇년 지속된 경제위기에 코로나19와 이번 폭발이 결정타가 됐다.

레바논의 인구는 400만명이고, 1500여만명이 레바논인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에 흩어져 산다. 한국에는 유동인구까지 합쳐도 100명이 채 되지 않는 레바논인 커뮤니티가 있지만 이들은 단단히 뭉쳐 있다. 열강에 의해 통치된 경험, 내전, 부존자원이 없는 척박한 환경 등 우리와 닮은 구석도 적지 않다. 루디는 “사계절,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이 특히 닮았다”고 했다. 레바논 폭발, 그 뒤의 얘기를 베이루트에 가족을 두고 온 레바논인 세명을 만나 직접 들었다.

―각자 소개를 해달라.

린다 쉐라라(32·이하 린다) “나는 열일곱살이 될 때까지 레바논에 살았다.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지금은 한국 대기업의 글로벌 전략 부문에서 일한다. 현재 부모님과 여동생 둘은 베이루트에 살고 있다.”

루디 카람(42·이하 루디) “7년 전에 베이루트를 떠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 베이징으로 왔다. 내 삶 내내 내전, 이스라엘 전쟁, 그리고 시리아 점령까지 폭격이나 총격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그 삶을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메르 삼훈(30·이하 사메르) “한국 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돼 2008년에 왔다. 형과 누나가 부모님과 함께 베이루트에 산다.”

세 사람은 직업, 종교, 성별 등 제각각이다. 교집합은 레바논인이라는 것뿐이다. 린다와 루디는 기독교인(마론파)이고, 사메르는 무슬림(수니파)이다.

―폭발 당시 어땠나?

루디 “가족 모두 무사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매일 눈뜨자마자 하는 일이 인터넷에서 레바논을 검색하는 일이다. 그리고 안부 전화를 한다. 지금 레바논 시위도 점점 더 규모가 커지고 과격해지고 있다. 경찰인 동생도 걱정이다. 가장 큰 걱정은 당뇨를 앓고 있는 어머니다. 인슐린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약을 구하지 못할 정도인가?

루디 “병원이 아예 마비가 됐다. 폭발로 병원이 제 기능을 못 한다고 들었다. 폭발 부상자들 수천명이 몰리고, 코로나19 확진자도 갑자기 급증하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레바논에서는 매일 성난 군중이 시내 한복판에 모여든다. 관공서는 이미 통제력을 잃은 상태다. 특히 의료체계의 붕괴는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 11일 180만명이 거주하는 베이루트 내 병원 시설 55곳 중 절반이 병원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복구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지병 앓는 어머니 약조차 못 구해

린다 “지금 레바논은 지옥이다. 폭발사건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살기가 너무 어려웠다. 전기가 수시로 끊겼고, 마실 물이 부족했다. 실업률까지 높아지니 사람들도 레바논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대해 정치인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 왔다. 폭발은 일종의 신호 같았다. 지옥이 열리는 파열음이랄까. 그 소리를 듣고 시민들이 거리로 다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사메르 “코로나19도 심각해졌다. 가족들에게는 무조건 조심하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안타깝다.”

레바논은 폭발사건 이전까지 하루 평균 50여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폭발 뒤에는 하루 확진자가 500명을 넘어섰다. 레바논 정부는 지난달 21일부터 봉쇄에 들어갔다. 2주 동안 식당 및 유흥시설과 체육시설, 쇼핑몰 등의 출입이 제한된다. 시내에는 식료품점만 문을 열며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 통행금지도 실시된다.

―레바논의 코로나19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메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의 발표를 믿기 어렵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루디 “답답한 건 그것만이 아니다. 식량이 모자란다. 아, 매일이 걱정이다.”

린다는 식탁 위의 피자를 가리켰다. “여기서 피자 한 판 값으로 거기서는 한 조각도 사기 어렵다. 인플레이션이 상상 이상이다. 경제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했다. 루디는 “한 조각에 8달러로도 어렵다. 그보다 식량 자체가 부족하다”고 했다. 이들은 가족들에게 달러로 생활비를 송금하고 있지만, 가족들이 필요한 만큼 인출해 쓰지도 못한다. 레바논 정부는 하루 달러 인출을 50달러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레바논은 현재 채무불이행 상태로 국제통화기금(IMF)에 원조를 요청했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질산암모늄 폭발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모인 시위 군중의 모습. 연합뉴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질산암모늄 폭발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모인 시위 군중의 모습. 연합뉴스

―그렇다고 한국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을 듯한데. 지난해 한국 사회에서는 난민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루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다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같이 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 경계하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린다 “내가 다니는 대기업은 국제적으로도 최고의 회사 중 하나다. 그런데 이태원발 확진자가 다수 있고 나서 외국인은 무조건 코로나19 검사를 받도록 했다. 나는 증상도 없었고, 이태원에 다녀오지도 않았다. 옆 한국 동료들은 검사 얘기가 나오지 않는데 유독 외국인들만 그렇게 사실상 강제로 검사를 받도록 하는 걸 보면서 차별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메르 “그래도 2008년 한국에 왔을 때와는 많이 변했다.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얘기는 돌고 돌아 다시 레바논의 정치다. 이들이 책임을 묻는 대상은 헤즈볼라다. 그리고 이를 후원해 종교적, 국가적 이익을 챙기는 이란 등 중동의 ‘시아파 벨트’의 국가들이다. 헤즈볼라는 지난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당시 결성된 시아파 무장조직이다. 199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레바논 내 종파별 조직이 무장을 해제했지만 헤즈볼라는 이를 거부했다. 1992년 의회에 진출했고, 2018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세력이 됐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각자의 종교는?

린다 “난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종교 때문에 헤즈볼라에 비판적인 것은 아니다. 레바논의 상황은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그냥 정부의 무능이 문제다.”

사메르 “나는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시아파 쪽에서도 헤즈볼라는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바논에서 종교에 따라 정치권력을 나눠 갖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정말 정치를 잘할 수 있는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정치를 해야 할 때가 됐다.”

린다 “알다시피 레바논에선 18개 종파가 권력을 나눈다. 예전엔 그런 합의 제도가 분쟁을 막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회피수단이 된다. 그들 중 누가 책임을 지려 하나.”

―내각이 총사퇴를 했는데.

린다 “그건 책임지겠다는 게 아니라 도망가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와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퇴하는 것, 그건 책임지는 게 아니다.”

폭발사건 이후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고 말하려다 영어가 부족해 보밍(bombing·폭격)이라고 표현했다. 익스플로전(explosion·폭발)으로 정정했지만, 모두 잠시 침묵하더니 오히려 다들 웃음을 지었다.

루디 “폭발이냐 폭격이냐 사실 아무도 모른다. 한 달이나 지났지만 누구의 것인지도 밝혀진 바 없다. 인화성이 큰 질산암모늄 2700톤이 항구에 6년이나 방치된 이유도 모르는데.”

문제는 정치다

사메르 “이런 비유가 미안한데, ‘세월호 사건’이 있지 않았나. 대한민국 국민 중에 그게 단순한 사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내가 알기로도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이번 폭발사고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무능과 부패가 누적돼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19와 겹쳐지면서 최악으로 가고 있다. 다른 사건이 또 벌어질까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나서달라고 국민들이 바라는 것이다.”

린다 “이번 폭발이 있고 나서 엄청난 소음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난 뒤로 사람들은 트라우마 안에 살고 있다. 여기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그곳을 떠나 그 먼지 속에 있지는 않았지만 트라우마를 함께 겪고 있는 느낌이다.”

―심지어 프랑스가 와서 통치하는 게 낫겠다는 얘기도 나오던데.

사메르 “언뜻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레바논 사람들은 안전한 삶이 중요해졌다. 법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프랑스를 원하는 마음은 그런 상식에서 나온 것이다.”

―레바논의 혼란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린다 “레바논을 돕기 위한 펀드를 만들고 있다. 참, 부탁이 있다. 경제적으로 레바논을 도우려거든 정부기관에 보내지 말아달라. 레바논 정부의 부패지수는 전세계 국가 중 완전 바닥이다(세계투명성기구 발표 180개 국가 중 137위). 그 돈은 분명히 어려운 자들을 위해 쓰이지 않을 것이다. 국제기구가 운영하는 민간단체에 보내야 한다.”

―레바논 민간 커뮤니티에서 돕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린다 “(집회 사진을 보여주며) 집회 상황을 온라인으로 퍼나르고, 인권침해 상황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레바논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힘이 된다. 인터넷으로 바깥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려고 한다.”

루디 “상황이 더 악화되면 난 레바논으로 돌아갈 것이다. 혼란이 더하면서 예를 들어 예전처럼 시리아가 레바논에 군대를 파견한다거나 그렇게 되면 나는 돌아가 싸울 것이다. 레바논은 레바논이고, 나는 레바니즈다.”

―레바논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린다 “일주일 말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웃음) 우선 지금처럼 종파에 따라 권력을 나눠먹는 식은 안 된다. 민의를 반영해 확실하게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집권세력이 구성돼야 한다. 헤즈볼라는 빼고.”

사메르 “중동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실험한 국가다. 내전을 치렀지만 그것을 합의에 의해 극복한 경험도 있다. 그래서 밝다고 생각한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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