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아프가니스탄 대표단의 엘루아 피용 전 단장이 지난 23일 서울 중구 퇴계로 한국사무소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전쟁이나 무력 충돌 현장에서 인도적 지원과 구호사업을 하는 국제기구다. 1863년 앙리 뒤낭이 창설했다. 현재 국제적십자위원회의 활동은 1949년 제네바 협약과 추가 의정서, 국제 적십자·적신월사 연맹의 결의에 근거한다. 기독교 문명권의 적십자사 표장이 붉은색 십자가인 반면, 이슬람권은 십자가 대신 붉은색 초승달(적신월)을 사용한다. 적십자위원회는 현재 100여개 국가에서 2만여명의 직원을 파견·고용해 긴급구호, 민간인 보호, 국제인도법 증진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까지 국제적십자위원회 아프가니스탄 대표단에서 일했던 엘루아 피용 전 단장이 현지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찾았다. 국제 구호사업에 대한 한국 정부와의 지속적인 협력과 연대를 다지기 위해서다. 그는 인도·에티오피아, 수단·이라크·시리아·팔레스타인 등 적십자위원회의 핵심 활동지역에서 30년 넘게 활동해온 인도주의 활동 전문가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국제적십자위원회 한국 사무소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한국사무소의 자밀라 함마리 대표도 자리를 함께했다.
아프간 의수족센터 7곳, 장애인 25만명 돌봄
―국제적십자위원회 활동이 다른 인도주의 기구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우리는 유엔 산하 기구가 아닌 독립 기구로, 정치적 중립성을 갖고 중재자 구실을 한다. 인도주의 기구로는 유일하다. 무력 분쟁의 쌍방 또는 모든 당사자와 대화하는 특별한 책임을 위임받는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을 때 국제적십자사가 적극 중재를 해서 인질 석방에 도움을 줬다. 분쟁 상황에서 피구금자나 포로를 접촉하는 것이 특정한 사법 프레임에서는 불법일 수 있지만,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다른 기구들에는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접근권을 부여받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다.”
―적십자위원회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올해 예산은 약 24억 스위스프랑 (약 3조 5000억원 )이다. 제네바 협약 가입국 정부들의 분담금이 재정 수입의 대부분 (약 87%)을 차지한다. 또 각국의 적십자사와 적신월사의 출연금 , 국제기구들의 지원 , 기업과 개인 같은 민간 부문의 자발적 기부금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최근 10년새 세계 전역에서 전쟁이 지속하거나 새로운 전쟁이 터졌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그 모든 곳에 구호 인력을 파견하고 인도적 지원을 한다. 재원은 한정돼 있는데 구호 수요가 급증한 셈이다.”
― 2021년 8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지 20년 만에 철군했다. 미군이 떠난 공백에 탈레반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아프간 전쟁 피해자와 난민들의 삶의 환경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아프간에서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기 몇 달 전에 현지에 부임해, 탈레반 집권 전후의 상황을 지켜봤다. 그전까지 많은 도시에서 (정부군과 탈레반 사이에)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실향민이 됐고, 주택, 수도, 전기 등 인프라가 파괴됐다. 곳곳에 전선이 형성돼 주민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새 정권에서 민생 치안은 개선됐지만, 교육·의료·인프라 등 정부의 공공서비스는 운영 자금이 없어 붕괴 직전이다. 이건 개선이 아니라 악화다. 적십자위원회는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고 실향민, 전쟁 부상자, 여성과 가정을 보호하는 데 즉각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추진했던 아프간 재건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재건 사업은 국제사회의 재정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중단됐다. 지금은 적십자위원회를 비롯해 극소수 단체의 긴급대응을 위한 인도적 기금만 허용돼 공공서비스를 지원할 여력이 안 된다 . 적십자위원회는 최우선 순위인 의료 서비스에 집중하고 있다 . 아프간 현지 의료진의 역량 강화를 위한 트레이닝을 해왔는데 , 그마저 중단하고 의료진 인건비와 병원 운영비 , 의료품 구매를 지원하는 데 그치는 실정이다 .”
―경제제재가 본디 대상보다는 대다수 민간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집단 처벌 ’이란 지적이 끊이지 않는데 ?
“경제제재로 금융시스템이 마비되고 민간 투자가 불가능해졌다. 아프간 경제가 충분한 일자리와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에서 빈곤선 이하 인구가 늘고 있다 . 국제사회에선 지금 상태가 지속돼선 안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 탈레반 정권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다. 균형 잡힌 접근법을 찾기 위해선 필요한 것의 우선순위를 정해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
―최근 2년 동안 적십자위원회가 아프간에서 가장 중점을 둔 사업들은?
“두가지에 초점을 맞췄다. 하나는 변화된 환경에서도 기존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운영하는 의수족센터 7곳에서 연간 25만명의 장애인을 돌본다. 세계 최대 규모다. 적십자위원회의 제네바본부에서 아프간으로 송금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센터들을 유지하는 것은 큰 도전이었지만 우리는 해냈다. 두번째 주요 과제는 핵심적 공공서비스의 재정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이었다. 아프간에서 가장 큰 33개 병원의 운영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아프간 전역의 대도시 주민에게 전기·에너지·상수도 공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관계당국들을 지원했다.”
―최근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아프간의 33개 병원의 운영 책임을 아프간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다 . 그런 결정의 배경과 의미는 ?
“무엇보다 예산 문제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장기간 동안 그 병원들에 엄청난 재원을 투입했는데, 한계에 부닥쳤다. 국제사회가 아프간의 새 정부와 타협점을 찾아서 부분적이나마 제재를 해제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사회와 아프간의 새 정부는 여전히 정치적 교착 상태다. 아프간에서 쓸 수 있는 인도주의 자금이 급감했고, 세계적 인플레이션과 각국 정부의 (국제구호 ) 예산 삭감으로 사태는 더 악화했다. 이 때문에 우리 기구도 예산 감축과 운영 축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단히 유감이고 안타깝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7주째 계속되고 있다. 민간인 피해가 너무 크다.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참을 수 없는 인류의 비극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병원 주변 등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에서 벌어지는 적대 행위는 의료진, 환자, 부상자, 미숙아, 장애인, 노인 등 가장 취약한 계층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적십자위원회 지원팀이 북가자 지역에 들어가기 위해 보장되어야 할 안전이 확보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가자지구 보건부 및 적대 행위 당사자들과 계속 대화하고 있다. 민간인들이 위험한 환경에서 대피해야 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분쟁 당사자들은 국제인도법을 준수하여 민간인, 의료인과 의료시설, 인도주의 활동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마스의 인질 납치도 명백한 국제인도법 위반이다. 인질 석방을 위해 여러 단체와 대화하고 있다.”
엘루아 피용 전 단장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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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아프간 농민, 기후변화 우려…저개발국에 더 치명적
―21세기 이후에만 이라크·아프간·시리아·우크라이나·수단·예멘·팔레스타인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된다. 인류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25년 넘게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국제인도법이다. 적대 행위 중 민간인과 민간시설을 보호하고, 이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국제인도법 원칙을 지켜야 한다. 국제인도법에 대한 존중을 잃으면 평화가 찾아오지 않고 결국 폭력이 되풀이된다.”(전쟁법 또는 무력충돌법이라고도 하는 국제인도법은 무력충돌 시 전투 능력을 상실했거나 적대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민간인을 보호하는 국제법이다.)
―인도적 활동의 한계를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일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활동 현장에서 종종
안전 문제에 직면한다. 직원들이 위협을 받거나 공격받아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분쟁 당사자들이 오로지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현장에 있는 적십자위원회의 활동을 존중하지 않을 때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날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의 지원이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을 집적 보는 것이 동기 부여가 된다.”
―거버넌스가 취약한 나라에서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 가닿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전달 체계의 장애 또는 정부 부패가 원인의 일부이다.
“우리가 활동하는 많은 국가, 특히 분쟁이 수십년간 장기화한 지역에서 거버넌스 실패, 부패 등의 문제는 분쟁의 원인이 될 수도, 분쟁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분쟁의 영향을 키우기도 한다. 이런 리스크들을 늘 염두에 두고, 부패 시스템에 갇히지 않도록 활동 프로세스를 짠다. 때론 취약한 거버넌스로 생긴 구멍들을 인도적 기구가 메꿔야 할 때가 있고, 그 때문에 일이 더 복잡해질 때도 있다.”
―글로벌 신냉전 국면, 기후변화가 불러온 커지고 잦아진 자연재해 등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 활동의 새로운 비전이나 유형이 필요할 것 같다.
“아프간의 경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자연재해에 매우 취약하다. 한국이나 일본(같은 선진국)은 자연재해의 피해가 작고 대응 능력이 강하다. 그러나 아프간 같은 나라는 지진·가뭄·홍수가 나면 훨씬 치명적이며 적절한 대응 수단이 없다. 나는 20년 전에도 아프간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기후변화는 지금처럼 세계가 주목하는 이슈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그때 현지 농부들은 여러해에 걸친 적설량 변화를 우리 직원들에게 설명하며 우려를 표현했다. 우리 기구도 그때부터 농촌 사회에 구체적인 지원을 제공하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해왔다.”
―한국은 20세기 동서 대결 구도에서 전쟁을 치렀고 수백만명이 숨졌다.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졌고 군사력도 강하지만 한반도의 안보는 여전히 위태롭거나 더 나쁘다. 한국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 일한 적이 없고 남북문제를 충분히 알지 못해 현명한 대답을 하긴 어렵다. 오늘 방문한 대한적십자사는 남북한의 이산가족 상봉을 돕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국 영화를 즐겨 보는데, 한국전쟁 당시 한 가족에서 두 사람이 (이념 차이로) 나뉘고, 그런 이별이 가족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볼 수 있었다. 그런 고통을 계속 두고 볼 수는 없다. 남과 북이 위기 해결을 위해 계속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독일도 오랫동안 분단을 겪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서독에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는데, 솔직히 우리 생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것이란 희망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그런 일을 목격했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똑같이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찾아오길 희망한다.”
엘루아 피용 전 단장이 인터뷰에 앞서 국제적십자위원회 한국사무소의 자밀라 함마미 대표와 포즈를 취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반도 상황에 대한 질문에는 자밀라 함마미 국제적십자사 한국사무소 대표가 따로 의견을 밝혀 왔다.
“한국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26일, 국제적십자위원회의 폴 루거 총재는 남·북한 정부에 동일한 전보를 보내 제네바협약에 명시된 인도주의 원칙의 준수를 촉구하고 적십자위원회의 지원을 제안했다. 이후 적십자위원회는 한국(남한)에서 전쟁 포로수용소, 군 병원, 임시 수용소에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정치·안보의 주요 위기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필요한 대응 조처를 한다. 주요 활동 파트너인 대한적십자사와 비상사태 대응에 관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한국 정부와 군대, 학계, 싱크탱크와 긴밀히 협력해 국제인도법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은 전 세계의 무력충돌에서 사람들이 직면한 인도주의적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다자간 포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이 된 것을 축하한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무력 분쟁과 그 결과로 인한 민간인 피해와 관련해 한국과 계속 협력하기를 기대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