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 하미 학살사건 희생자를 위한 49주기 위령제에서 당시 사건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제단에 향을 올리고 있다.
[토요판] 르포
베트남 하미 49주기 위령제
▶ 다낭은 한국인으로 미어터집니다. 한해 방문자 60만명. 1, 2월 성수기엔 한국에서 뜨는 직항 비행기가 하루 16편이나 됩니다. 저가항공이 취항한 2016년부터는 다낭을 찾는 한국인이 일본인과 중국인을 넘어섰습니다. 베트남 여행지 가운데선 하노이와 호찌민을 제쳤습니다. 청정한 자연과 안전, 고급 리조트를 자랑합니다. 하미 마을은 다낭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면 30분도 안 걸립니다.
비문은 먼 역사로 시작한다.
“예로부터 디엔즈엉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신성한 기운을 머금은 락롱꿘과 어우꺼의 자손들이 호아인선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땅을 넓혀 500년 전 이곳에 나라를 세웠다. 백성들은 하미, 하꽝, 하방, 하록, 자록 등에 마을을 세웠으며 본디 어질고 선한 그들은 평화롭게 아이를 낳아 키우며 쟁기질과 괭이질로 땅을 일구고 채소를 가꾸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갔다.”
비문은 어떤 징조를 통과한다.
“누가 알았으랴.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적들이 사납게 들이닥쳐 땅에 풍파를 일으켰다.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전략촌을 세우고 강제로 마을과 고향을 버리게 하였으니 칼로 자르듯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에 주민들은 땅을 잃고 강을 잃고 바다를 잃었으며 농사를 짓고 강과 바다에서 고기 잡는 삶을 잃었다.”
비문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 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중략) 시체에는 여전히 마른 피가 고여 있고 아기들은 어머니의 배에 기어올라 차갑게 시든 젖을 찾았다. (중략) 이 일이 있은 후에 또 하나의 참극이 더해졌으니 탱크의 강철 바퀴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황혼이 서린 땅에는 풀이 시들고 뼈들은 말라가고 원혼이라도 나타난 듯 구름은 푸른 하늘에 울부짖었다.”
비문은 애틋한 결론을 맺는다.
“그 옛날의 전장은 이제 고통이 수그러들고 과거 우리에게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슬픔을 안긴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사과를 하였다. 그리하여 용서를 바탕으로 비석을 세우니 인의로써 고향의 발전과 협력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모래사장과 포플러 나무들이 하미 학살을 가슴 깊이 새겨 기억할 것이다. (중략) 천년의 구름이여,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그날, 1968년 2월22일”
비문이 새겨진 위령비는 옥빛 바다를 품은 베트남 중부 꽝남성(도) 디엔반현(군) 디엔즈엉사(읍) 하미 마을에 있다. 지난 20일 오전 7시부터 이곳에서 하미 학살사건 희생자를 위한 49주기 제사와 위령제가 열렸다. 제사가 시작되자 파란 제사복을 입은 마을 원로가 노란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며 독경을 읊어나갔다. “팔이 잘려 나뭇가지에 걸렸던 님이여, 머리가 잘려 땅에 굴렀던 님이여.” 그는 망자들의 마지막 떠나던 길을 길게 묘사했다. 빨간 옷과 파란 옷을 입은 또 다른 마을 노인 두 명은 북과 징을 울렸다. “한을 푸소서. 우리는 오늘 아이처럼 웁니다. 영령들이여, 자식을 살피듯이 하미를 살펴주소서.” 위령비 앞 향불을 피운 제단 아래 의자에는 쩐민호앙 서기장, 딘훙리엔 주석 등 디엔즈엉사 공산당 및 인민위원회 간부들과 유가족 20여명이 자리했다. 그 한켠엔 김남주(41) 변호사 등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방문단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51) 이사 등 한국 쪽 인사들이 앉았다.
1157㎡(400여평)에 이르는 하미 마을 위령비 부지는 베트남 정부가 2011년 1월 국가적으로 지정한 역사유적이다. 위령비 전면엔 희생자 135명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 있다. 그 양쪽으로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안치한 두 개의 공동무덤이 있다. 1968년 2월22일(음력 1월24일), 마을 부근에 주둔하던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이 잠들어 있다. 생존자들은 “그 시신 위로 군인들이 불도저를 밀고 갔다”고 증언했다. 역사유적인 이곳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정해진 반경 안에서는 건물을 짓는 행위가 불허된다. 외국인들의 발길도 잦다. 한국에서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이 1999년 9월 처음으로 하미 사건을 알린 이래, <오마이뉴스> <한겨레> 등이 꾸준히 보도를 해온 덕분이다. 일본에서는 이토 마사코 교토대 대학원 교수가, 영국에서는 권헌익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각각 <전쟁기억의 정치학>(2013)과 <학살, 그 이후>(2012)라는 책으로 하미 이름을 퍼뜨린 공이 크다. 하미 해변엔 프랑스 자본이 투자한 리조트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묵는 외국인 여행객들도 위령비를 종종 둘러본다.
오전 7시40분. 제사가 끝나고 위령제 추도사가 이어졌다. 딘훙리엔(51) 인민위원회 주석과 응우옌꼬이(72) 유가족 대표는 “그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우리는 아직 고통에 몸부림친다”며 날카롭게 서두를 꺼냈지만 마무리는 따뜻했다. “다행스럽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갑니다. 한국 친구들의 애정과 관심에 감격합니다”라는 식이었다. 위령비 제단에는 한국 단체에서 보낸 조화가 가득했다. 세어보니 14개였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노동당, 산마을고등학교, 제주작가회의, 아이쿱한밭생협, 연세의료원, 베트남스토리, 호아빈의 리본, 천안소녀의상 건립추진위원회, 순천향대서울병원 노조, 평화박물관, 나와 우리, 전북평화의상 건립시민추진위원회, 한베평화재단….
제사 직전에 인사를 나눈 응우옌반뚜언(36) 부주석은 ‘베트남 프렌즈’라는 동아리 소속의 한국 의정부 중고생들 칭찬을 했다. 지난해 12월, 20명의 학생들이 거리에서 엽서를 팔아 모은 돈이라며 1천만동(한국 돈 50만여원)과 학용품 두 상자를 들고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를 방문했다. 하미 위령비를 참배하러 온 길이었다. 응우옌반뚜언 부주석은 “작은 정성이었지만, 한국 학생들의 마음이 너무 예뻤다”고 말했다.
하미 학살사건 희생자를 위한 49주기 제사에서 마을 원로가 제문을 낭독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 단체의 ‘검열’
오전 8시30분. 유가족과 한국 방문단이 제단에 절을 하고 향을 올린 뒤 위령제 공식행사가 끝났다. 제사음식을 함께 나눠먹기 전 인민위원회 간부들과 유가족 대표, 한국 쪽 인사들이 잠시 회의를 열었다. 내년 2018년은 50주기다. 인민위 간부들과 유가족 대표는 또 다른 50년을 준비하는 50주기 위령제를 꽝남성 차원의 큰 행사로 치를 계획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큰 도로에서 위령비로 난 500m 길이 흙길을 승용차가 들어올 수 있게끔 넓게 포장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금이 가서 비가 새는 위령비의 보수와 새단장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유가족들이 돈을 모으겠다며 한국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는 “내년을 꽝남성 피해자 추모의 해로 정하고 최대한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은 특별한 해다. 50년 전인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꽝남에 발을 디딘 한국군 청룡부대 병력 5천여명은 이 일대를 피로 물들였다. 1968년 한해에만 꽝남에서 2천명 넘는 민간인이 희생됐다. 내년 하미뿐 아니라 퐁니·퐁넛, 투이보, 주이응이어, 빈즈엉 등에서 50주기 위령제가 줄줄이 열리는 이유다. 회의가 끝날 무렵 구수정 이사가 물었다. “50주기엔 비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문. 지난 10여년간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던 일종의 금기어였다.
글 앞부분에서 길게 인용한 비문은 위령비 뒷면에 있다. 아니 없다. 있되, 없다. 마을 주민들이 지역의 유명 시인에게 의뢰한 작품이었다. “학살 광경과 살아남은 이들의 심정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잘 표현했다”는 평을 얻었지만 비문은 갇혀 있을 따름이다. 그 위를 연꽃 문양 대리석이 덮었다. 쩐민호앙 공산당 서기장이 답했다. “또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요.” 응우옌꼬이 유가족 대표가 말을 받았다. “저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비문 사건’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2000년 12월에서 2001년 5월 사이 벌어진 일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한겨레21>이 처음 보도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대책의 하나로, 피해 지역인 중부 5개 성에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한국국제협력단(KOICA) 자금 200만달러를 확보했다. 2000년 12월 현지 답사를 떠난 하노이 주재 한국 대사관 참사관 이아무개씨는 꽝남성에 왔다가 하미마을 위령비 비문을 발견했다. 이 위령비는 월남참전전우복지회라는 한국의 참전군인 단체가 건축자금 2만5천달러를 지원했다. 2000년 5월 기공식을 연 뒤 준공을 앞둔 상태였다. 참사관 이씨는 이 비문이 한국에 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전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 단체 지원에서 비롯되었기에 더욱 그렇다고 봤다. 하노이에 돌아와 베트남 정부 주요 관리들을 접촉해 비문 수정·삭제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2001년 5월, 하미를 비롯한 꽝남성엔 한국 정부가 지어주는 10개의 학교가 합동기공식을 앞두고 있었다. 위령비에 돈을 댄 월남참전전우복지회도 비문 내용을 바꾸라고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를 압박했다. 베트남 중앙정부는 한국 요청을 받아들여 꽝남성 지방정부에 같은 내용의 지시를 내려보냈다. 핵심 당사자는 유가족과 생존자였다. 이들은 유가족협의회를 통해 “이것은 우리의 역사”라며 저항했다. ‘학살’이라는 단어를 빼라는 요구엔 분노했다. 버티던 유가족협의회는 한국과 베트남 정부를 이기지 못했다. 대신 비문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기로 했다. 그 위에 포개진 연꽃 문양 대리석은, 언젠가는 비문을 열겠다는 다짐이었다.
오전 9시. 회의가 끝났다. 이제 제사음식과 술을 나누는 음복의 시간. 한베평화재단은 제사와 위령제 비용으로 한국에서 모은 2천만동(100여만원)을 전달했다. 떡과 돼지고기, 야채볶음, 햄 등 푸짐한 베트남 전통음식과 ‘라루에’라는 현지 맥주가 상에 올랐다. 민변 방문단이 제주(祭酒)로 가져온 ‘안동소주’와 ‘화요’도 그 틈에 끼였다. 한국 방문단에 술을 권유하며 건배를 하던 한 유가족이 말했다. “2000년 참전군인 단체 돈으로 위령비를 세우기 시작했죠. 하지만 진짜 비를 세워준 사람들은 진심을 갖고 찾아온 한국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요.” 위령비 준공식은 기공식 1년 7개월 뒤인 2001년 12월10일 열렸다. 준공식엔 기공식 때 참여한 참전군인 단체 회원 몇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위령비를 세워주었으니, 아픔이 있다면 이제 잊자”는 입장이었다. 이후 마을 주민들이 그들의 방문을 목격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 단체의 지원으로 위령비가 건립됐다는 사실을 알리던 팻말은 누군가에 의해 뽑혔다.
이후 주민들은 위령비를 찾는 한국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맞았다. “한국 사람 돈으로 위령비를 세웠으니 굳이 참배를 말리지는 않겠다”는 태도였다. 갈라진 관계의 복원은 10년이 더 흐른 2013년에나 가능했다. 아맙과 평화박물관 등 평화단체가 대대적인 참배객을 모아 방문한 45주기 위령제 때부터다. “내가 죽기 전 위령제에 참가해달라”는 생존자 고 팜티호아 할머니(2013년 6월16일, 87세로 타계)의 절절한 당부가 한몫했다.(<한겨레> 2013년 7월6일치 참조) 그 45주기 행사 때 유가족들은 덮여 있는 비문 내용을 액자에 넣어 한국 방문단 대표에게 선물했다. 그들의 진짜 마음이었다.
2001년 5월, 연꽃으로 덮이기 전의 하미 위령비 비문.
비문과 소녀상은 어떻게 통하나
12시 정오. 세 시간 넘게 흥겨운 웃음과 함께 출렁이던 술자리도 파할 시간이 되었다. 호의만을 교환한, 부족함이 없는 자리였다.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는 19년째 인연을 맺어온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에게 전폭적 신뢰와 애정을 보냈다. 재단이 제안한 하미 사건 공동기록 사업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비문, 한 가지만 빼고.
‘평화의 소녀상’(소녀상)이 떠올랐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일본총영사관 앞에 세운 소녀상에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부도 부산시와 동구청 등에 소녀상 이전을 요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연꽃 뒤에 가려진 하미의 비문은, 한-일 정부가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부산의 소녀상과 같은 운명처럼 보인다. 낙후된 지역에 학교를 지어주며 하미 비문을 수정·삭제하라고 압력을 가했던 한국 정부의 모습은, 한-일 간의 12·28 합의를 거론하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모두 해결된 듯 말하는 일본 정부를 닮았다.
2001년 비문을 놓고 가슴앓이를 하던 시절, 한 유가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 군인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쏴 죽인 것은 1차 학살이었다. 시신 위를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은 2차 학살이었다. 비문에 간섭하며 내용을 빼라 마라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3차 학살이다.”
한국 정부의 ‘검열’로 17년째 봉인된 하미의 비문은 국익을 성취한 한국의 자랑거리일까. 음력 1월24일인 하미 50주기 위령제 날은 양력으로 2018년 3월11일. 그날, 성대한 행사도 좋지만 참혹하되 아름다운 절창의 비문이 열리는 기적은 불가능할까.
꽝남 디엔즈엉(베트남)/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하미 마을 위령비 내의 희생자 공동무덤 앞에서 한국 방문단 일행이 참배하고 있다.
하미 학살사건 희생자를 위한 49주기 제사에서 마을 원로가 제문을 낭독하고 있다.
하미 학살사건 희생자를 위한 49주기 제사 풍경.
하미 학살사건 희생자를 위한 49주기 제사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