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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사무실 냉방온도 토론할 때 거리의 노동자는 쓰러졌다

등록 2023-07-20 05:00수정 2023-07-20 10:33

유럽 폭염
1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 성당 광장에서 한 음악가가 햇볕을 피하기 위해 우산 아래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이날 이탈리아 전역에 기온이 40˚ C에 달하는 폭염이 이어졌다. AP 연합뉴스
1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 성당 광장에서 한 음악가가 햇볕을 피하기 위해 우산 아래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이날 이탈리아 전역에 기온이 40˚ C에 달하는 폭염이 이어졌다. AP 연합뉴스

“폭염 때문에 두통이 생겼어요. 이틀에 한 번은 약을 먹어야 할 정도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자전거를 타고 음식 배달을 하는 나비드 칸(39)은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무더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일을 멈출 수가 없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배우자와 두 아이가 있다. “제대로 된 직업이 있다면 더위 속에서 잠시 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한텐 이 일밖에 없어요.”

이탈리아 등 남부 유럽 지역에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더위를 피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 불평등이 심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뉴욕타임스>는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 이변은 더 빈번하고 심각해졌다”라며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 때처럼 아프거나 늙은 사람, 빈곤층, 노동자들이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폭염 속에서 격차는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밀라노에서 양복을 갖춰 입은 회사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자신의 사무실로 뛰어간다. 여름 휴가차 이 도시를 방문한 관광객은 더위를 식히려 바에 앉아 음료를 홀짝인다. 현지 주민은 올해도 극심한 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을 대비해 휴가를 떠났다.

반면, 칸과 같은 배달 노동자는 사무실에서 주문한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더라도 주문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다. 밀라노의 공항 활주로에서는 수하물 처리 노동자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비행기에서 짐을 내린다. 도심과 해변을 잇는 고속도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는 맨가슴 위 안전 조끼를 걸친 노동자가 무거운 양동이를 나른다.

이미 섭씨 40도를 넘은 남부 유럽의 기온은 더 오를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지난주 밀라노에서는 거리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현장에서 일하던 중 쓰려졌다.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결국 사망했다. 피렌체 외곽에선 청소 노동자가 창고에서 일하다 정신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다. <뉴욕타임스>는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폭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003년 폭염 당시 사망한 약 7만명 가운데 대부분은 저소득층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여름 유럽 전역에서는 6만1천명 넘는 이들이 폭염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취약 계층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민자나 자영업자, 임시직 노동자 등이 더위에 과하게 노출되거나 탈수 증세를 보일 위험이 크다.

지난해 유럽에서는 사무실 냉방 온도를 두고 토론이 이뤄졌다. 하지만 사무실 밖 더위로 고통받는 노동자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동조합은 더위가 위험할 정도로 심해지면 회사가 작업을 중단하고 노동자에게 물과 시원한 휴식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탈리아 보건 당국은 노동자들이 자주 휴식을 취하고 더위가 덜 심한 때로 근무 시간을 옮길 것을 권고한다. 예컨대 햇볕이 뜨거운 낮에 일하는 대신 새벽 6시부터 낮 2시까지 일하는 식이다.

2021년 유럽노동조합연구소에서 ‘폭염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펴낸 사회학자 클라우디아 나로키는 “폭염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라며 “역설적이게도 폭염에 가장 많이 노출된 일자리의 급여가 가장 낮다”라고 말했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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