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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코로나19 수상한 시절에 ‘유일하게 안전한’ 독일의 그곳

등록 2020-03-14 09:34수정 2020-03-14 15:24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17회 베를린의 여성 공간 ‘베기네’

1986년 문 연 여성 전용 카페 ‘베기네’
전시회·철학모임·요가·파티 등 열려
이주·난민여성 모두 따듯하게 품어

1977년 여성공동체 펍 ‘크랄레’ 설립
고용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로 일해
힝켈슈타인 인쇄소는 여성 주도 작업장
2018년 8월 베를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전용 카페 ‘베기네’ 세미나룸에서 전쟁 성폭력 문제를 알리는 전시회와 토론회를 열고 있다. 채혜원 제공
2018년 8월 베를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전용 카페 ‘베기네’ 세미나룸에서 전쟁 성폭력 문제를 알리는 전시회와 토론회를 열고 있다. 채혜원 제공

독일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번역가인 코리나 바펜더(Corinna Waffender)는 2002년 베를린에 있는 여성 카페 ‘베기네’(BEGiNE)를 처음 방문했다. 당시 코리나는 갓 출간한 첫 장편소설 <행간을 읽다>(Zwischen den Zeilen) 낭독회를 앞두고 있었다. 단편소설 세 편을 출간한 경험이 있지만 장편소설 발표는 처음이라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 한가운데 놓인 그랜드피아노가 눈에 들어왔고, 오래된 조명들이 공간 곳곳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과연 몇 명이나 낭독회에 올까, 텅 빈 카페를 바라보며 코리나는 갑자기 공포에 휩싸였다.

행사 시작까지 시간이 여유롭게 남아 있던 터라 주변 거리를 걷다가 다시 베기네로 돌아왔을 때, 카페 앞은 수많은 여성으로 가득했다. 출판인을 포함한 모두가 환히 웃으며 코리나를 반겼다. 18년 전이지만 그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이후 그는 이곳을 자주 찾는다. 베기네에는 늘 수많은 여성의 친구와 연인, 동반자가 있고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여러 예술 무대, 정치 토론, 파티가 열린다. 코리나는 베기네를 찾을 때마다 고향에 온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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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연대의 여성 관객의 눈빛”

1986년 문을 연 여성 전용 공간 ‘베기네’는 베를린에서 게이들이 모여 사는 놀렌도르프플라츠 근처에 있다.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 및 인터섹스들이 운영하는 다양한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이 있는 동네다.

베기네의 역사는 1980년대 빈집을 점거하고 재건축한 ‘스콰팅’ 여성 운동가들이 카페와 문화센터로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베기네는 여성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3월 한달만 해도 여성 뮤지션과 함께하는 재즈의 밤, 요가 수업, 작가 크리스타 볼프 및 프란치스카 하우저와 함께하는 문학의 밤, 탱고&록 파티, ‘자유와 메타포’ 정치-철학 모임, 페미니즘 정당 모임, 퀴즈 파티 등 매일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특히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 낭독회나 영화 상영회 등을 통해 여성 예술가 작품이 알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비르기타 알터만 역시 코리나처럼 베기네에서 연주할 때마다 예술활동을 이어갈 용기와 지지를 얻는다. 그는 “베기네는 여성들이 무언가를 보여주고, 또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며 “호기심과 연대의 눈빛을 보내주는 여성 관객들 덕분에 베기네에서 연주하는 것을 오래전부터 좋아한다”고 말했다. 워낙 다양한 여성들이 베기네를 찾다 보니, 공간에 머물다가 우연히 독일 페미니스트 알리스 슈바르처나 배우 마렌 크로이만같이 잘 알려진 언니들을 만날 수 있는 건 덤이다.

베를린에서 게이들이 모여 사는 놀렌도르프플라츠 근처에 있는 여성 전용 카페 베기네에서는 매일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베기네 제공
베를린에서 게이들이 모여 사는 놀렌도르프플라츠 근처에 있는 여성 전용 카페 베기네에서는 매일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베기네 제공

카페 안쪽으로 들어가면 100명 정도 수용 가능한 세미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내가 활동 중인 ‘베를린 국제 페미니스트 연합’도 종종 이곳에서 페미니즘 행사를 연다. 2018년 8월에는 전쟁 성폭력 문제를 알리기 위한 전시·토론 공간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베기네 쪽이 이 공간을 열흘간 무료로 내주기도 했다. 이처럼 카페 베기네는 학문,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네트워킹을 맺고 여러 행사를 함께 기획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한다.

카페 베기네 외에도 베를린에는 여러 페미니즘 공간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전용’이다.(여기서 ‘여성*’은 FLTI, 즉 여성(Frauen), 레즈비언(Lesben), 트랜스(Trans) 및 인터(Inter)섹스 그리고 남녀가 아닌 제3의 성별을 뜻하는 논바이너리를 포함한다.)

페미니즘 공간은 대개 여성 공동사업체(Kollektive)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카페 크랄레(Café Cralle)는 베기네보다 조금 앞선 1977년에 육아시설을 갖춘 여성 공간으로 설립됐다. 크랄레가 지향하는 가치는 카페 한편에 적힌 글귀로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등을 떠나 모든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장소를 지향하며, 이에 어떤 형태의 차별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베를린의 가장 오래된 여성 공동사업체 펍인 ‘크랄레’는 현재 7명의 여성 회원이 이끈다. 모두가 고용 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에서 일한다. 크랄레에서도 베기네처럼 매일 다양한 정치 토론과 문화 행사가 열리고, 매주 마지막 목요일에는 ‘FLTI’ 모임이 열리고 있다. 대부분 동네 이웃이 참여하며, 서로 네트워크를 맺고 일상을 공유한다.

여성 공동사업체 ‘힝켈슈타인 인쇄소’ 작업실에서 웃고 있는 노동자 코라와 자비네. 힝켈슈타인 인쇄소 제공
여성 공동사업체 ‘힝켈슈타인 인쇄소’ 작업실에서 웃고 있는 노동자 코라와 자비네. 힝켈슈타인 인쇄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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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베를린의 또 다른 유서 깊은 여성 공동사업체로는 ‘힝켈슈타인 인쇄소’(Hinkelsteindruck)가 있다. 여기는 베를린, 특히 크로이츠베르크 지역 활동가라면 모두가 아는 곳이다. 집회나 행사 등 정치활동을 조직할 때 홍보물, 출판물 등 인쇄물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선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인쇄하는 곳이 많은데, 복잡하고 큰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 남성 지배적인 영역이지만 힝켈슈타인은 여성들이 이끄는 작업장이다.

힝켈슈타인 여성 회원들은 1980년대 옛 동독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하던 중 동베를린 환경도서관의 지하 인쇄소에서 만났다. 1991년부터 인쇄소를 운영하고, 1995년부터는 직업교육산업체로 등록해 여성 직업훈련생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인쇄뿐만 아니라 디자인, 편집 등의 작업도 함께 진행한다.

힝켈슈타인은 내가 일하는 ‘국제여성공간’(IWS)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국제여성공간 동료인 데니지는 “우리는 기획부터 인터뷰, 번역, 편집, 교정, 사진, 레이아웃에서 인쇄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참여한 독립출판물로 난민 여성 증언을 담은 두 권의 책을 만들어왔는데 누구보다 힝켈슈타인의 역할이 컸다”며 “인쇄비가 모자랄 때 그들은 언제나 돈 걱정 하지 말고 나중에 돈이 마련되면 가져오라며 늘 우리를 신뢰해주고 기다려줬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힝켈슈타인 인쇄소에서 국제여성공간 활동가 리카에게 인쇄소 노동자 자비네가 기계 작동법을 알려주고 있다. 채혜원 제공
2018년 3월 힝켈슈타인 인쇄소에서 국제여성공간 활동가 리카에게 인쇄소 노동자 자비네가 기계 작동법을 알려주고 있다. 채혜원 제공

무엇보다 두번째 책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 있다>(WE EXIST, WE ARE HERE)를 처음 인쇄하던 날, 힝켈슈타인에서 일하는 코라와 자비네는 우리를 작업장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커다란 아날로그 인쇄 기계를 작동하기에 앞서 간단한 작업에 한해 우리가 직접 해볼 수 있도록 가르쳐줬다. 잉크를 붓고, 용지를 넣고, 나사를 조이는 등 생전 처음 인쇄 기계를 작동해보면서 우리의 책이 여성들의 특별한 협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올해 봄부터 국제여성공간은 여러 집회와 책 낭독회, 영상 상영회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인데 홍보물을 만들 때마다 늘 그랬듯 힝켈슈타인의 코라와 자비네와 함께 일할 것이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길거리에서 매일 아시아인을 바이러스 취급하는 인종차별을 겪고 있다. 직접적인 욕설을 듣기도 했고, 대중교통에서 나를 보면 갑자기 옷으로 호흡기를 가리거나 멀리 피하는 일을 겪는 것은 일상이 됐다. 존엄성이 무너지는 끔찍한 경험이다. 하지만 여성만 일하는 우리 사무실과 카페 베기네와 같이 여성 공간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이런 치욕을 잊을 수 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지 않는다. 공간 속 여성들은 여성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반겨준다. 독일 여성뿐만 아니라 나 같은 이주여성, 난민여성 모두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따뜻하게 품어준다.

나는 오늘도 베를린의 여성 공간으로 향한다. 독일에서 유일하게 안전과 평화를 느끼는, 나의 ‘공간’으로.

▶채혜원: 한국에서 여성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와 젠더 이슈를 전한다. 격주 연재.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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