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업체 ‘에이에스엠엘’(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가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기술 수출 규제 압박에 불만은 제기하고 나섰다. 그가 경영 실적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펠트호번/EPA 연합뉴스
미국이 네덜란드와 일본에 대중국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 규제’를 강화하도록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장비 업체 최고경영자(CEO)가 미국의 압박에 불만을 제기하고 나섰다.
네덜란드 반도체 제조용 광학 장비 업체인 ‘에이에스엠엘’(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는 13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일간지 <엔에르세 한델스블라트>와 인터뷰에서 중국이 최첨단 반도체 기술을 군사용으로 활용하면 안보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미국 정부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순수한 군사용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기술은 10~15년 된 기술”이라며 “이런 기술로 만든 반도체는 여전히 중국에 수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의 압박으로 네덜란드 정부가 지난 2019년 극자외선(EUV)을 이용하는 노광(레이저로 실리콘 표면에 전자회로를 새겨넣는 작업) 장비의 중국 수출을 이미 금지한 점을 상기시키며, 이 때문에 자사가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에이에스엠엘은 세계에서 극자외선 노광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다. 이 장비는 실리콘에 13.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파장의 초정밀 레이저를 쏠 수 있어,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데 필수적이다. 이보다 정밀도가 한 단계 떨어지는 장비의 파장은 193㎚다.
베닝크 최고경영자는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중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데 별다른 제약이 없다며 미국 업체와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했다. 그는 “극자외선 장비 수출 금지로 중국에서는 첨단 반도체가 생산되지 않고 있지만 첨단 반도체 칩들은 여전히 중국에 팔리고 있으며, 미국의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중국 납품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전체 매출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수준이지만 미국 업체들의 경우는 25%, 때로는 30% 이상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극자외선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해 미국 업체들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중국이 고성능 반도체 칩을 만들려면 (극자외선 장비 대신) 주로 미국 업체들이 만드는 다른 장비를 사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은 14일 베닝크 최고경영자의 이 발언은 미국이 네덜란드와 일본 등에게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강화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고 지적했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12일 일본·네덜란드와 미국이 두달 전 취한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와 유사한 조처를 취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 10월7일 18㎚ 이하의 정밀 디램 반도체, 128층 이상의 고집적 낸드 메모리 등 첨단 반도체와 관련 기술을 중국에 제공할 경우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통제 조처를 발표했다.
미국이 대중국 반도체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주로 겨냥하고 있는 업체는 에이에스엠엘과 일본의 ‘도쿄 일렉트론’이라고 <로이터>가 전했다. 두 업체는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 리서치’ 등과 함께 세계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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