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가 살해당한 이탈리아 대학생 줄리아 체케틴의 유가족들이 5일(현지시각) 이탈리아 파도바 산타 주스티나 대성당에서 열린 줄리아 체케틴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 유가족 뒤로 체케틴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운집한 1만여 명의 추도객이 보인다. AFP 연합뉴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내 딸 줄리아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딸을 잃은 아버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준비해온 추도문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내 딸 줄리아의 기억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함께 폭력에 맞서는 변화의 영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고통의 비가 우리 삶이라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주기를, 그리하여 언젠가 그 자리에 사랑·용서·평화가 싹트고 열매 맺기를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함께 기원하고 싶습니다. 안녕, 줄리아, 잘 가거라 내 딸.”
지난달 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가 살해당한 이탈리아 대학생 줄리아 체케틴(22)의 생전 모습이 5일(현지시각) 그의 장례식이 엄수된 이탈리아 파도바 산타 주스티나 대성당 외벽에 걸려있다. 유튜브 갈무리
5일(현지시각) 이탈리아 파도바 산타 주스티나 대성당에서 열린 줄리아 체케틴의 장례식에서 아버지 지노 체케틴이 추도사를 읽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가 살해된 이탈리아 대학생 줄리아 체케틴(22)의 장례식이 엄수된 5일(현지시각), 그의 아버지 지노 체케틴이 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추도객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날 장례식이 엄수된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파도바의 산타 주스티나 대성당과 그 앞 광장에는 체케틴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비 내리는 날씨에도 1만여명이 운집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전했다. 유가족과 추모객은 여성혐오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적 캠페인을 상징하는 붉은 리본을 옷에 달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고인이 다니던 파도바대는 이날 오전 장례식에 참석하는 학생들을 배려해 오전 수업을 취소했고, 공공기관들은 조기를 게양했다.
파도바대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한 체케틴은 졸업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지난달 18일 파도바에서 직선 거리로 86㎞ 이상 떨어진 포르데노네의 한 호수가 인근 도랑에서 검은 비닐에 싸인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의 주검에서 수차례 찔린 상처가 발견됐다.
체케틴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건 지난달 11일 전 남자친구인 필리포 투레타(21)를 만나러 외출했다가 실종된 지 일주일 만이다. 이탈리아 경찰은 도로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통해 실종 전 체케타의 마지막 모습을 확보했다. 영상 속에는 체케틴이 차에서 내려 도망치려다 뒤따라온 투레타에게 붙잡혀 폭행당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유가족과 친구들은 체케틴이 투레타에게 이별을 고했지만, 투레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현지 언론에 말했다.
용의자로 지목된 투레타는 체케틴이 실종된 직후 자취를 감췄다가 체케틴의 주검이 발견된 다음 날인 지난달 19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체포됐다. 도주 중 기름이 떨어져 차를 갓길에 세웠다가 경찰에 검거됐다고 한다. 현재는 이탈리아로 인도돼 구치소에서 구속 상태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5일(현지시각) 이탈리아 파도바 산타 주스티나 대성당에서 엄수된 줄리아 체케틴의 장례식에 참석한 추도객들이 체케틴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장지 이송 차량에 실리는 동안 머리 위로 차키를 흔들며 소리를 내고 있다. 여성혐오 폭력에 소리내어 저항하라는 사회적 캠페인의 일환이다. 유튜브 갈무리
실종 당시부터 이탈리아 언론을 달군 이 사건이 체케틴의 죽음으로 귀결되면서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적 공분이 일었다. 대학생들은 여성혐오 폭력에 소리 높여 저항하라는 의미에서 수업 중 다같이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는 시위를 벌였고, 이탈리아 곳곳에서 체케틴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가해자인 투레타의 부모마저 촛불 집회에 참석했다고 에이피 통신은 전했다.
조르지아 멜로니 총리도 나서서 올 한해(11월12일까지) 이탈리아에서 102명의 여성이 여성혐오 폭력으로 사망했고, 그 중 53명은 연인에 의한 죽음이었다며 여성혐오 폭력에 분노를 표현했다.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RAI)도 저녁 메인 뉴스 프로그램의 첫 꼭지를 전하며 올 한해 이탈리아에서 여성혐오 살인으로 희생된 여성들의 초상으로 스튜디오 배경을 뒤덮으며 추모에 동참했다.
지노 체케틴도 이날 장례식장에서 “페미사이드(여성혐오 살인)는 여성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문화의 소산”이라며 “여성들은 그들을 사랑했어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빼앗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책임을 피할 수 없겠지만, 가장 먼저 남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가장 먼저 나서 젠더 폭력에 대항하는 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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