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라크전: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세계 쏙] 노벨평화상 화학무기금지기구와 ‘두 개의 전쟁’
[세계 쏙] 노벨평화상 화학무기금지기구와 ‘두 개의 전쟁’
지난 11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이하 금지지구)를 선정했다. 미국 주도의 침공 직전까지 몰렸던 내전의 땅 시리아에서 화학무기 폐기 작업을 벌이고 있는 금지기구의 노고를 평가한 것일까? 토르비에른 야글란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금지기구는 오랜 세월 동안 화학무기 근절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제 그 목표에 거의 다가서 있다. 지구촌에서 대량살상무기 가운데 한 종류인 화학무기가 마침내 사라질 날이 머지 않았다. 인류 역사에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야글란 위원장은 “금지기구에게 평화상을 수여하는 이유가 시리아 때문만은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아흐메트 위쥠쥐 금지기구 사무총장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위쥠쥐 총장은 영국 <비비시>(BBC) 등과 한 인터뷰에서 “현재 시리아에서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 직원들의 노력을 평가해준 결과”라고 말했다.
2001년말 사담 후세인 정권
화학무기금지협정 가입 검토
OPCW도 이듬해 사찰 준비 2001년 9·11 테러 이후 상황 급변
미국, 원칙 고수한 총장 해임 주도 결국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아
2011년 말까지 16만명 이상 ‘희생’ 금지기구가 시리아에 ‘평화’를 가져다 준 건 아니다. 미국 주도의 침공 직전까지 몰렸던 시리아 사태를 외교적으로 푼 것은 러시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금지기구의 수상에 이의를 다는 이들은 많지 않다. 금지기구의 활동이 2년 반을 넘긴 시리아 내전에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터다. 위쥠쥐 총장도 “사찰단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일시적이라도 교전을 멈추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금지기구는 10년여 전에도 비슷한 상황과 만난 바 있다. 2003년 3월20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다. 바샤르 아사드 정권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때도 미국은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를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아사드 정권이 1주일 안에 화학무기를 모두 내놓는다면….” 미국의 시리아 공습이 임박했던 지난 9월9일 존 케리 국무장관은 영국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시리아가 미국 주도의 침공을 피할 방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한 게다. 이라크 침공을 불과 넉달여 앞둔 지난 2002년 11월23일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도 “후세인이 퇴진하지 않더라도, 입증 가능한 무장해제만 이뤄진다면 전쟁 위기로 치닫는 대치 상태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리아는 침공을 피했다. 이라크는 그렇지 못했다. 시리아와 달리 이라크에선 금지기구가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은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화학무기금지기구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7년 4월29일이다. 5년 임기의 초대 사무총장으로는 브라질 출신 직업 외교관 조제 부스타니가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부스타니 총장의 지휘 아래 금지기구는 창설 초기 5년 동안 막대한 양의 화학무기를 폐기해냈다. 전세계 화학무기 생산·보관시설의 3분의 2가 이 시기에 사라졌다. 출범 당시 87개국이던 회원국이 불과 5년 남짓 만에 145개국으로 늘어난 것도 금지기구의 ‘실효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2000년 5월 금지기구 회원국들은 총회를 열어 부스타니 총장의 임기를 5년 연장했다. 잔여 임기를 1년이나 남겨둔 상태에서, 역시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이었다. 앞서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은 그해 2월 부스타니 총장에게 따로 서한까지 보내 “지금까지 금지지구가 이뤄낸 성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치하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굳이 따지자면, 2001년 9.11 동시테러 직후부터다. 2002년 1월 조지 부시 행정부는 브라질 정부에 부스타니 총장을 ‘소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업무 스타일에 문제가 많다”는 게 이유였다. 브라질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해 3월 미국이 다시 움직였다. 금지기구 집행위원회에 부스타니 총장 신임투표를 안건으로 올린 게다. 당시 미국이 밝힌 근거는 크게 네 가지였다. 2002년 4월16일 <가디언> 보도를 보면, 미국은 부스타니 총장이 “재정운영을 미숙하게 하고, 직원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데다, 잘못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재정운영의 미숙함’이다. 당시 금지기구가 예산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금기지구 예산의 22%를 떠맡고 있는 미국이 분담금 납부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예산부족에도 금지기구 직원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가디언>은 당시 보도에서 “세계 각지에서 실제 군축작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었다. 부스타니 총장의 ‘죄업’은 나머지 두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부시 행정부가 언급한 ‘편견’의 근거는, 미국을 예외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시 부스타니 총장이 이끄는 금지기구는 다른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화학무기 시설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사찰은 진행했다. 당시 미국은 일부 사찰단이 이른바 ‘적성국가’ 출신임을 문제 삼아 현장 접근을 거부하거나, 사찰대상에 제한을 두기까지 했다. 부스나티 총장이 추진했다는 ‘잘못된 업무’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금지기구가 주목하고 있던 국가는 리비아와 이라크였다. 특히 미국의 침공 위협 수위가 높아가고 있던 사담 후세인 정권은 2001년 말 금지협정 가입을 적극 고려하고 있었다. 이라크가 협정에 가입한다면, 다른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사전 예고없이, 제한없는 사찰을 받게 된다. 이건 무슨 뜻일까? 현재 프랑스 주재 브라질 대사로 일하고 있는 부스타니 총장은 13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2002년 1월 말부터 금지기구 사찰요원들은 이라크 출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론 제1차 걸프전 이후 이라크 정부가 1990년대에 보유하고 있던 화학무기를 전량 폐기했다는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사찰을 통해 화학무기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면, 미국의 침공 명분은 원천무효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금지기구 집행위원회는 2002년 3월19일 표결을 통해 미국이 추진한 불신임안을 부결시켰다. 부시 행정부는 그저 물러서지 않았다. 다자외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 추진됐다. 부스타니 총장 해임을 위한 회원국 특별총회를 소집한 게다. 그해 4월14일 총회가 개막됐다. 해임안에 대한 표결은 4월22일 이뤄졌다. ‘노벨상의 나라’인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포함해 미국·한국·일본 등 모두 48개국이 찬성표를 던졌다. 중동과 남미 국가 대부분은 기권을 선택했다. 기권표는 찬성표보다 단 5표 적은 43표였다. 브라질·중국·러시아 등 7개 나라가 해임안에 반대했다. 금지협정에 규정조차 없는, 임기중 사무총장에 대한 ‘탄핵’이었다. 부스타니 총장도 선선히 물러나진 않았다. 국제기구 직원이 근로조건과 관련해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행정심판원에 그해 7월19일 제소를 한 게다. 행정심판원은 2003년 7월16일 △위법한 해임으로 무효 △3년3주의 잔여임기에 대한 임금 지급 △정신적 피해 배상 등을 뼈대로 한 ‘결정 제2232호’를 내놨다. 완벽한 승소였다. 부스타니 총장은 13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02년 미국은 이라크가 금지협정에 가입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했다. 2013년엔 협정에 가입하고 사찰단을 받아들이는 게 시리아 정책의 일부가 됐다. 차이라면 그것 뿐이다.” 그 차이가 하나의 전쟁을 만들고, 또 다른 전쟁은 피할 수 있게 했다. 2011년 말 미군이 철군을 마칠 때까지, 이라크에선 민간인 11만여명을 포함해 모두 16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화학무기금지협정 가입 검토
OPCW도 이듬해 사찰 준비 2001년 9·11 테러 이후 상황 급변
미국, 원칙 고수한 총장 해임 주도 결국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아
2011년 말까지 16만명 이상 ‘희생’ 금지기구가 시리아에 ‘평화’를 가져다 준 건 아니다. 미국 주도의 침공 직전까지 몰렸던 시리아 사태를 외교적으로 푼 것은 러시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금지기구의 수상에 이의를 다는 이들은 많지 않다. 금지기구의 활동이 2년 반을 넘긴 시리아 내전에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터다. 위쥠쥐 총장도 “사찰단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일시적이라도 교전을 멈추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금지기구는 10년여 전에도 비슷한 상황과 만난 바 있다. 2003년 3월20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다. 바샤르 아사드 정권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때도 미국은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를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아사드 정권이 1주일 안에 화학무기를 모두 내놓는다면….” 미국의 시리아 공습이 임박했던 지난 9월9일 존 케리 국무장관은 영국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시리아가 미국 주도의 침공을 피할 방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한 게다. 이라크 침공을 불과 넉달여 앞둔 지난 2002년 11월23일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도 “후세인이 퇴진하지 않더라도, 입증 가능한 무장해제만 이뤄진다면 전쟁 위기로 치닫는 대치 상태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리아는 침공을 피했다. 이라크는 그렇지 못했다. 시리아와 달리 이라크에선 금지기구가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은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화학무기금지기구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7년 4월29일이다. 5년 임기의 초대 사무총장으로는 브라질 출신 직업 외교관 조제 부스타니가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부스타니 총장의 지휘 아래 금지기구는 창설 초기 5년 동안 막대한 양의 화학무기를 폐기해냈다. 전세계 화학무기 생산·보관시설의 3분의 2가 이 시기에 사라졌다. 출범 당시 87개국이던 회원국이 불과 5년 남짓 만에 145개국으로 늘어난 것도 금지기구의 ‘실효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2000년 5월 금지기구 회원국들은 총회를 열어 부스타니 총장의 임기를 5년 연장했다. 잔여 임기를 1년이나 남겨둔 상태에서, 역시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이었다. 앞서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은 그해 2월 부스타니 총장에게 따로 서한까지 보내 “지금까지 금지지구가 이뤄낸 성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치하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굳이 따지자면, 2001년 9.11 동시테러 직후부터다. 2002년 1월 조지 부시 행정부는 브라질 정부에 부스타니 총장을 ‘소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업무 스타일에 문제가 많다”는 게 이유였다. 브라질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해 3월 미국이 다시 움직였다. 금지기구 집행위원회에 부스타니 총장 신임투표를 안건으로 올린 게다. 당시 미국이 밝힌 근거는 크게 네 가지였다. 2002년 4월16일 <가디언> 보도를 보면, 미국은 부스타니 총장이 “재정운영을 미숙하게 하고, 직원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데다, 잘못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재정운영의 미숙함’이다. 당시 금지기구가 예산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금기지구 예산의 22%를 떠맡고 있는 미국이 분담금 납부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예산부족에도 금지기구 직원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가디언>은 당시 보도에서 “세계 각지에서 실제 군축작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었다. 부스타니 총장의 ‘죄업’은 나머지 두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부시 행정부가 언급한 ‘편견’의 근거는, 미국을 예외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시 부스타니 총장이 이끄는 금지기구는 다른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화학무기 시설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사찰은 진행했다. 당시 미국은 일부 사찰단이 이른바 ‘적성국가’ 출신임을 문제 삼아 현장 접근을 거부하거나, 사찰대상에 제한을 두기까지 했다. 부스나티 총장이 추진했다는 ‘잘못된 업무’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금지기구가 주목하고 있던 국가는 리비아와 이라크였다. 특히 미국의 침공 위협 수위가 높아가고 있던 사담 후세인 정권은 2001년 말 금지협정 가입을 적극 고려하고 있었다. 이라크가 협정에 가입한다면, 다른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사전 예고없이, 제한없는 사찰을 받게 된다. 이건 무슨 뜻일까? 현재 프랑스 주재 브라질 대사로 일하고 있는 부스타니 총장은 13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2002년 1월 말부터 금지기구 사찰요원들은 이라크 출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론 제1차 걸프전 이후 이라크 정부가 1990년대에 보유하고 있던 화학무기를 전량 폐기했다는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사찰을 통해 화학무기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면, 미국의 침공 명분은 원천무효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금지기구 집행위원회는 2002년 3월19일 표결을 통해 미국이 추진한 불신임안을 부결시켰다. 부시 행정부는 그저 물러서지 않았다. 다자외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 추진됐다. 부스타니 총장 해임을 위한 회원국 특별총회를 소집한 게다. 그해 4월14일 총회가 개막됐다. 해임안에 대한 표결은 4월22일 이뤄졌다. ‘노벨상의 나라’인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포함해 미국·한국·일본 등 모두 48개국이 찬성표를 던졌다. 중동과 남미 국가 대부분은 기권을 선택했다. 기권표는 찬성표보다 단 5표 적은 43표였다. 브라질·중국·러시아 등 7개 나라가 해임안에 반대했다. 금지협정에 규정조차 없는, 임기중 사무총장에 대한 ‘탄핵’이었다. 부스타니 총장도 선선히 물러나진 않았다. 국제기구 직원이 근로조건과 관련해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행정심판원에 그해 7월19일 제소를 한 게다. 행정심판원은 2003년 7월16일 △위법한 해임으로 무효 △3년3주의 잔여임기에 대한 임금 지급 △정신적 피해 배상 등을 뼈대로 한 ‘결정 제2232호’를 내놨다. 완벽한 승소였다. 부스타니 총장은 13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02년 미국은 이라크가 금지협정에 가입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했다. 2013년엔 협정에 가입하고 사찰단을 받아들이는 게 시리아 정책의 일부가 됐다. 차이라면 그것 뿐이다.” 그 차이가 하나의 전쟁을 만들고, 또 다른 전쟁은 피할 수 있게 했다. 2011년 말 미군이 철군을 마칠 때까지, 이라크에선 민간인 11만여명을 포함해 모두 16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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