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주변에는 80여년 전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산 뒤쪽 빈터에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매일 밥을 먹던 식당 자리다. 안내판 하나 없이 휑한 모습이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가동 나쁜 자(일을 못하는 이)에게 탄압 정책을 취하고 근로과에 데려와 때리는데 차마 보고 있을 수 없는 폭력이었다.”
옛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던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의 노무 담당자 스기모토 소지는 1974년 이 광산의 역사를 조사하던 혼마 도라오(1926~2006)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스기모토는 1940년 1월 충청남도 논산에서 조선인 100명(실제 광산 도착은 98명)을 ‘집단 모집’ 방식으로 강제동원한 인물이었다.
편지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놓고 현재 한-일 간에 치열한 줄다리기가 진행 중인 사도광산으로 조선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원되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적혀 있다. “그들 입장(조선인 노동자)에서 본다면 강제노동을 당하고 1년 모집이 수년으로 연기돼, 반 정도 자포자기인 상태가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한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온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24일 사도광산의 강제노동 실태를 규명한 한·일 시민 공동조사보고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을 내놨다.
한·일 시민들은 일본 정부·경찰이 만든 18개의 공문서, 스기모토 등 노무계 직원의 증언, 2004년 설립된 한국 정부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접수된 피해신고(148명이 피해자로 인정) 내용 등을 종합 검토해 사도광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1519명의 강제노동 실태를 종합적으로 규명해냈다. 한·일 시민들은 이 가운데 700여명의 명부를 완성했고, 18명의 사망 실태를 확인했다.
미쓰비시 사도광산의 노무 담당자 스기모토 소지가 사도광산의 역사를 조사하던 혼마 도라오에게 1974년 보내온 편지. 조선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광산으로 동원되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광산에 말 그대로 ‘강제동원’됐다. 스기모토는 모집에 앞서 희망지역·고용기간·직종 등을 적어 조선총독부에 제출했고 희망지역에서 노동자들을 할당받기 위해 총독부·도청·군청 관계자에게 “외교전술”(접대를 의미하는 말)을 사용했다. 조선총독부의 행정력은 철저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동됐다. 군청의 노무 담당자가 면사무소의 노무 담당자를 독촉해 인원을 모으면 경찰이 사상 등 신원조회를 해 탄광으로 보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유봉철(1916년생·논산)은 “1940년 사도광산에 동원됐다. 논산의 학교 교정에 모였다. 100명 정도가 논산역에서 부산을 경유해 사도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같이 동원됐던 김문국(1913년생·논산)은 “귀국 후 진폐증을 앓게 돼 숨이 가빠 이불을 접어 등에 기대면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상태”로 몸이 망가졌다. 그는 치료와 생계를 위해 논밭을 팔아야 했고 40대에 숨져 가족에게 거액의 빚을 남겼다.
윤종광(1922년생·청양)은 “1941년 부모,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아내를 남겨두고 동원”됐고 “처음에는 근무기간 2년이라고 했지만 아무 설명 없이 갱신됐다”는 증언을 남겼다.
김수형(1928년·청주)은 “가족이 많은 집에서 먼저 징용을 가야 한다며 면서기와 보국대 담당자가 와 동원해 갔다”고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1940년 646명 등 총 1519명이 광산에 끌려갔다.
노동 환경은 극히 열악했다. 1940년 3월 일본 내무성 경보국 특별고등경찰이 펴낸 <특고월보>를 보면, 논산에서 동원돼 막 광산에 도착한 조선인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2월17일 쟁의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인들은 옆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구타를 당했고, 견디다 못해 탈출하는 이들도 많았다. 1941년 12월15일치 가라후토(현 남사할린)청 경찰공보를 보면 1941년 11월 미쓰비시 사도광업소에서 도망간 4명의 조선인 함연태·조옥동·윤성명·이화실이 수배됐음을 알 수 있다.
위험한 갱도 내 작업은 대개 조선인이 감당했다. 사도광업소가 1943년에 만든 자료 ‘반도 노무관리에 대하여’를 보면 그해 5월 현재 위험한 갱내 작업을 담당하던 이 646명 가운데 481명(74.5%)이 조선인이었다.
미쓰비시광업은 월급을 모두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고 여러 이유로 저축·보험 등에 가입시켰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일본이 패전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이 돈을 받지 못했다. 결국 조선인 1140명이 남긴 미지급 임금 23만1059원59전은 10년 공탁 뒤 시효가 만료돼 일본 국고에 편입됐다.
한·일 시민단체들은 지난 11일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 유네스코의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에 한국어·영어·일본어로 작성된 보고서와 의견서를 제출했다.
한·일 시민단체들이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여러 노력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혼마 등 향토 사학자들이 축적한 자료를 1990년대 사도시와 니가타현 시민들이 적극 발굴했다. 이들은 1991·1992·1995년 세차례나 한국을 방문해 피해자들을 찾아 나섰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피해자 본인·유족들을 현지에 두번 불러 증언 집회도 열었다.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 내에 자리한 대표적 유적지인 ‘기타자와 부유선광장’의 모습. 일본 최초로 금은광석에서 금·은 등을 채취하는 부유선광법(浮遊選鉱法)이라는 공법을 도입했다. 1938년 완공 뒤엔 한달에 5만t의 금은광석을 처리할 수 있는 ‘동양 제일’의 시설로 이름을 떨쳤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노동과 둘러싼 논란을 피해가려고 에도시대(1603~1867) 유산 만을 대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어 대상에서 빠지게 됐다. 1940년 부유선광장의 모습.사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이후 한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역사적 진실’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론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2021년 4월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연행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으며, 당시 조선인들이 국제법에 비춰 강제노동을 당한 게 아니라는 내용을 각의결정(국무회의 의결)했다. 이를 납득할 수 없었던 한·일 시민들은 그동안 축적된 자료를 적극 재발굴하고 한국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던 피해자들의 신고 내용 등을 열람해 보고서를 완성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일본의 역사 연구가 다케우치 야스토는 “일본 정부는 아베 신조 정권 들어 강제노동을 부인하고 이런 잘못된 역사 인식 아래 단순히 관광을 위한 자원으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며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역사 부정론을 극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도 “한·일 시민과 피해자들이 양국 정부의 역사 부정 시도를 극복하고 실체적인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려 노력한 것이 이번 작업의 의미”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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