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가 2022년 9월1일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99주기 추도식을 열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에 대한 광범위한 학살이 발생한 이유는 뭘까. 그동안 한·일 역사학자들은 크게 두 갈래의 설명을 시도해왔다.
첫번째는 대지진이란 비상 상황에서 평소 조선인에게 편견과 차별 의식을 갖고 있던 일본인이 학살과 같은 극단적 대응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조선이 1910년 일본에 강제병합된 뒤 적잖은 조선인이 더 나은 임금과 생활 조건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건너온 값싼 조선인 노동력은 일본인 하층 노동자에게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3·1운동 이후 조선인의 일본 도항을 억제했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이 시작되자 1922년 12월 제한을 철폐한다. 1922년 일본 거주 조선인은 5만9865명이었지만 이듬해인 1923년엔 8만617명으로 1년 사이 2만명이나 늘었다.
대지진 당시 도쿄 인근에 살던 조선인은 일부 유학생을 빼고 대개 토목 현장에서 일하던 저임금 노동자였다. 이들은 일본 거주 경력이 짧고 대부분 일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이들과 일본인 하층 노동자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겨났을 것이고, 이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과 편견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설명을 따른다면 학살은 ‘자연발생’한 게 된다.
두번째는 ‘조선인을 일본의 적’으로 생각했던 일본 지도부가 일본에 대지진이라는 심각한 치안상의 위기가 발생하자 명확한 의도를 갖고 학살을 ‘유도’했다는 설명이다.
간토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의 치안 부분을 담당하던 이들은 3·1운동과 그 이후 만주에서 진행된 조선인의 무장투쟁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다. 조선인의 소요를 명분 삼아 ‘계엄령’을 발동한 미즈노 렌타로(1868~1949) 내무대신(행정안전부 장관)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 경찰 통수권자인 아카이케 아쓰시(1879~1945) 경시총감(경찰청장)은 그 밑의 경무국장으로 재직했다. 특히 미즈노는 사이토 마코토 3대 조선총독과 함께 부임하기 위해 1919년 9월2일 남대문역에 도착한 직후 강우규(1855~1920) 열사가 던진 폭탄에 부상을 당했다. 지진 당시 일본 육군 1사단장이었던 이시미쓰 마오미는 3·1운동을 현장에서 겪은 조선총독부 헌병사령관, 계엄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아베 노부유키(훗날 조선의 마지막 총독)는 시베리아 출병군 참모장이었다.
미즈노 내무대신은 지진 다음날인 1923년 9월2일 계엄을 선포하는 담화문에서 “인심이 흉흉한 가운데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조선인 소요까지 발생했다. 오키 (엔키치) 철도대신 같은 이도 ‘조선인이 공격해온다는 소문이 한창 다마강변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며 계엄령을 선언하는 이유로 ‘조선인들의 난동 소문’을 꼽았다. 간토대지진 연구의 1인자였던 재일조선인 사학자 강덕상(1931~2021)은 “이런 경력의 보유자들이 ‘적은 조선인’이라고 생각해 계엄 출동을 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인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간토대지진 이후 학살된 조선인은 6천여명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2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학살 직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로서 이재동포위문반에서 피해 조사에 참여했던 최승만은 1985년 출판 회고록에서 “1923년 말 도쿄와 요코하마 부근에 조선인이 약 3만명 정도 있었고, 학살 이후 간토지방 각 지역에 수용돼 있었던 인원이 7580명이었다”며 “(3만명에서 7580명을 뺀) 2만2420명은 학살당했다고 봐도 과언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라고 결론 내린다. 어떤 수치를 택하든 끔찍한 대량 학살이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