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은 1982년 9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아라카와 근처에서 유골 발굴 작업을 시작했지만 끝내 유골을 발견하지 못했다. 1923년 11월 경찰이 이미 유골을 옮겨 은폐했다는 신문기사를 이듬해인 1983년에 발견하게 된다. 재일동포 사진가 배소 제공
“저곳이 예전에 요쓰기바시(다리)가 있던 곳이에요. 간토대지진 당시 이 주변에서 일본 군대와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하천 부지에 100여명 정도 묻혔다고 합니다. 안타깝지만 이름도 모르고, 유골도 찾지 못했어요.”
지난 11일 오전 11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파탑인 ‘스카이트리’가 한눈에 보이는 도쿄 스미다구에 있는 아라카와 강변. 니시자키 마사오(63) 사단법인 ‘호센카’(봉선화) 이사는 한 손에 사진 자료를 들고, 100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참극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온이 35도까지 치솟아 그냥 서 있기도 힘든 날씨지만, 니시자키 이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그날을 설명했다.
■ 목격자 “일본도 베고 죽창 찌르고…임신부도 죽였어요”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규모 7.9의 대규모 지진이 수도권인 간토(관동) 지방을 강타하면서 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 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지진이 일어난 시간이 점심때라 불을 사용하고 있는 집이 많아 화재 피해가 컸다. 도쿄의 경우 약 44%, 요코하마는 80%에 달하는 지역이 소실됐다. 파괴된 가옥만 약 29만3천동, 사망자·행방불명자는 10만5천명을 넘어서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당시 불안한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일본 정부가 2일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했다는 게 재일사학자 강덕상(1931~2021) 등이 밝힌 이 학살극의 본질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군·경찰·자경단이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니시자키 마사오(63) 사단법인 ‘호센카’(봉선화) 이사가 지난 11일 도쿄 스미다구에 있는 아라카와 강변에서 한 손에 사진 자료를 들고, 100년 전인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철교는 게이세이전철 오시아게선이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니시자키 이사가 학살 장소로 설명한 요쓰기바시는 길이 247.3m, 폭 3m의 목조 다리로 1969년 철거됐다. 게이세이전철 오시아게선의 철교와 기네가와바시 사이에 있다.
그날 이 지역 재향군인회·청년단 등으로 구성된 ‘자경단’은 다리 초입에 검문소를 만들어 조선인을 골라냈다. 당시 아라카와에선 대규모 방수로 공사가 있었고, 저렴한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조선인 노동자가 많이 일하고 있었다.
“확실히 (1923년 9월) 3일 낮이었어요. 요쓰기바시 아래쪽에 조선인을 몇 명씩 묶어 자경단이 죽였단 말이죠.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했던지, 일본도로 베고 죽창으로 찌르고, 철봉으로 찍고 해서 죽였단 말이에요. 배가 많이 불렀던 임산부도 있었지만, 그냥 찔러 죽였어요. 내가 봤을 때 서른명 정도 죽이고 있었죠.”(목격자 아오키 증언)
자경단뿐 아니라 일본군도 학살에 가담했다. “22~23명의 조선인을 기관총으로 죽였던 게 요쓰기바시 하류 강둑 밑이었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죄다 죽인 겁니다. 여자도 2~3명 있었어요. 너무 심했어요. 홀랑 벗겨 장난을 하고 있었어요.”(목격자 오카와 증언)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1982년 만든 ‘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이 직접 발로 뛰어 작성한 자료집(‘바람이여 봉선화의 노래를 전해다오’라는 책으로 출간)에는 목격자와 생존자의 증언이 다수 실려 있다.
추모 모임은 그날의 진실을 규명하고,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유골 발굴에 나섰다. 1982년 9월 증언을 토대로 아라카와 근처에서 발굴을 시도했지만 유골을 찾지 못했다.
■ “일본 경찰, 조선인 학살 조직적 은폐”
이듬해인 1983년 발견한 과거 신문기사에서 이유를 찾았다. 당시 경찰과 군대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노동운동가들도 살해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유가족이 유골 반환을 요구했다. 경찰은 요쓰기바시 근처에 조선인들과 같이 묻어 구별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노조단체와 유족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규모 학살이 발각될까 두려웠던 경찰은 사전에 유골을 빼돌렸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것이다.
“1923년 11월12일과 14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두번째 이송에서 트럭 3대 분량의 유골이 옮겨졌다고 해요. 유골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조직적인 은폐가 이뤄졌기 때문에 누가 얼마나 희생됐는지 알 수 없는 겁니다.” 니시자키 이사는 “일본 정부가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인 학살은 도쿄 등 간토 지역 전역에서 이뤄졌다. 학살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사이타마로 도망한 조선인을 기다리는 것은 현지 자경단이었다. “사이타마에선 조선인이 223~240명가량 희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른 지역에선 경찰·군대 학살이 같이 이뤄졌는데, 이곳에선 자경단 중심이었어요.”
지난 22일 사이타마현 소메야에 있는 절 조센지(상천사)에서 만난 세키하라 마사히로(70) 일조협회 사이타마현 연합회장은 “이 지역의 조선인 희생자는 도쿄 등 외부에서 도망 온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간토에선 어디를 가도 조선인이 살아남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생각에 무섭고 막막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 묘비 정면에 ‘조선인 강대흥 묘’
조센지에는 굉장히 특이한 묘가 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자경단에 의해 살해된 조선인 강대흥의 묘비다. 정면에 큰 글씨로 ‘조선인 강대흥 묘’라고 적혀 있다. “학살 희생자 중에 자신의 민족과 개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소메야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됐을 겁니다.”
사이타마현 소메야에 있는 절 조센지에는 1923년 9월4일 새벽 자경단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인 학살 피해자 강대흥의 묘지가 있다. 윗쪽 돌 정면에 ‘조선인 강대흥 묘’라고 적혀 있다. 사이타마/김소연 특파원
강씨는 1923년 9월4일 24살에 생을 마감했다. 사이타마현 경찰은 도쿄에서 현으로 피신 온 조선인 수백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들을 군마현으로 이송할 계획이었다. 강씨는 이 중 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강씨는 홀로 이탈했고, 4일 새벽 가타야나기 마을에서 자경단과 마주친다. “4㎞ 거리를 필사적으로 도망친 것 같아요. 발이 수로에 빠지면서 쫓아오던 자경단에게 잡혀 칼과 창으로 찔렸습니다.”
세키하라 회장은 강씨가 도망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안내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도망치다가 결국 자경단에게 죽임을 당한 자리엔 ‘사이타마시 커뮤니케이션센터’ 건물이 덩그러니 들어서 있다.
세키하라 회장은 강씨를 비롯한 조선인이 학살된 데 일본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했다. 9월3일 오전 일본 내무부 경보국(경찰국)은 ‘조선인이 각지에 방화를 내고 있다. 엄밀히 단속하라’는 문서를 각 지방에 보낸다.
■ 유언비어 ‘조선인 폭동’이 공식 문서로
지방 정부도 움직이고 있었다. 사이타마현은 이보다 빠른 2일 밤 내무부장 명의로 산하 군청에 ‘불령선인 폭동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마을의 ‘재향군인·소방단·청년단 등이 협력해 경계를 맡고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안을 강구하라’고 적혀 있었다.
“불령선인은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자경단을 조직해서 마을을 지키라고 전투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세키하라 회장은 “무엇보다 ‘조선인 폭동’이 공식 문서를 통해 전달되며 자경단은 유언비어를 진실로 인식했을 것”이라며 “학살이 급속히 확산된 이유”라고 강조했다.
지난 22일 세키하라 마사히로(70) 일조협회 사이타마현 연합회장이 1923년 9월4일 새벽 자경단에 의해 살해를 당한 24살 조선인 강대흥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키하라 회장은 강씨가 도망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설명하며 “간토에선 조선인이 살아남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사이타마/김소연 특파원
도쿄의 남쪽에 자리한 가나가와현도 학살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곳이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히가시가나가와역에서 느린 걸음으로 30분쯤 걸어가면 ‘국토교통성 요코하마 항만공항기술조사사무소’ 건물이 나온다.
대지진 당시 이 근처엔 아사노 조선소가 있었다. 기술사무소 건물이 있는 곳은 아사노 조선소 매립 공사를 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집단 숙소인 ‘함바’가 있던 곳이다.
지난 21일 만난 야마모토 스미코(84)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장’은 함바가 있었던 장소를 손으로 가리키며 “거기서 머물던 조선인 노동자 50여명이 학살됐다”고 말했다.
과거 신문기사를 뒤져 찾아낸 내용이다. 누가 언제 죽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집단 학살이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이곳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경찰입니다. 조선인은 그전부터 위험인물로 꼽혀 항상 감시를 당하고 있었어요.”
야마모토 위원장은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 2013년 실행위원회를 만들어 지역 도서관을 뛰어다니며 신문기사·일기·공문서 등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를 모아 2014년 ‘요코하마에서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 “기록 없다”는 일본 정부
도대체 왜 이런 무차별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일까.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를 평생 연구했던 강덕상 선생은 저서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이 집단 학살은 △대규모 재해로 인한 민중들의 분노가 혹시 왕실이나 치안당국으로 향하지 않을까 염려한 관헌 수뇌부의 술책 △식민지 시기 조선에 대한 적대정책과 만연한 차별 △3·1 독립운동 등 조선 민중에게 느꼈을 공포심 등이 겹쳐 발생한 민족 범죄였다는 것이다.
간토대지진 이후 100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한번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확한 희생자 수와 학살의 원인 등이 정확히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당대 조선인들이 직접 조사한 결과가 그나마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단체들이 1923년 10월까지 조사한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 내용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3년 12월5일치에도 실린다.
지난 21일 야마모토 스미코(84)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장이 조선인 노동자들이 집단 학살된 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아사노 조선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50여명이 ‘함바’에서 학살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국토교통성 요코하마 항만공항기술조사사무소’로 접근이 어렵다. 가나가와/김소연 특파원
조사 결과를 보면, 가나가와현이 3999명으로 희생자가 가장 많고 도쿄도 1781명, 사이타마현 488명, 지바현 329명, 군마현 34명, 도치기현 8명, 이바라키현 5명 등 총 6644명이다. 독립신문은 이를 6661명으로 보도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와 격차가 크다. 일본 사법성(현 법무성)은 조선인 희생자를 총 230명으로 집계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연구한 야마다 쇼지 릿쿄대학 명예교수는 저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에서 “사법성 발표의 문제점은 조선인 학살 수를 감추려 했던 것만이 아니다. 군대와 경찰의 학살은 제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독립신문에 실린 통계도 (조사의 한계 등으로)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최근 자료는 일본 내각부 중앙방재회의가 2008년 내놓은 분석 보고서다. 이 문서에서 일본 정부는 “당시 인위적인 살상행위가 일어났다. 희생자의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지진 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의 1%~수%에 해당한다. 살상 대상은 조선인이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이를 근거로 희생자 수를 수천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00년이나 됐지만 일본 정부는 “관련 기록이 없다”는 무책임한 말로 제대로 된 진상조사와 사죄를 외면하고 있다. 가해자 처벌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군과 경찰은 아예 처벌을 받지 않았고, 자경단들은 붙잡혀 수사와 재판을 받게 되지만 대부분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이마저도 나중에 특별사면이 됐다.
야마모토 가나가와 실행위원장은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인 교토 ‘우토로 마을’에 20대 일본인 청년이 혐오·편견으로 방화라는 중범죄를 저질렀다”며 “100년 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밝혀야 반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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