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임영섭 | 재단법인 피플 미래일터연구원장
정부는 지난 11월30일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산업재해예방 방식을 규제와 처벌 중심에서 ‘자율규제’와 예방 중심으로 바꾸어 2026년까지 노동자 1만명 당 산재 사망자 수(사망 만인율)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0.29로 낮추겠다는 대책이다.
그간에도 ‘산재공화국’ 오명을 벗기 위해서 크고 작은 대책을 추진했다. 2019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 개정해 사업주의 의무를 대폭 강화하고 위반 때 처벌 형량도 높였다. 작년에는 독립법으로는 세계 두 번째로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하다가 사고로 사망하는 노동자가 한해에 800명이 넘어 사망 만인율이 오이시디 38개 국가 가운데 34위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령은 ‘지시적 규제방식’의 전형이다. 사업주가 지켜야 할 사항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정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첨단기술시대에는 현장의 상황을 규제가 따라가기 어렵다. 1120개가 넘는 조항이 있지만 사고가 나면 정작 적용 조항을 찾지 못하기도 한다. 규제는 사업장 현실과 맞지 않고 사업주는 규제를 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영국은 1974년 규제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여러 법에 나뉘어 있던 규제를 통합하고, 목표는 부여하되 그 실현방법을 사업주에게 맡기는 ‘목표기반 규제’로 전환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현재 영국은 사망 만인율이 우리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세계제일의 안전선진국이 되었고 다른 나라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규제방식을 지시적 규제에서 목표기반 규제 즉 위험성 평가를 통해서 사업주 스스로 안전보건 관리를 하게 하는 자율규제로 바꾸기로 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한데 그 실현 방안을 들여다보니 뭔가 허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우선, 실현 방안의 핵심으로 ‘위험성 평가를 하지 않거나 평가가 적정하지 않으면 처벌하여 실시율을 높이고, 하위규정인 산업안전보건규칙을 처벌규정과 예방규정으로 나누어 자율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처벌조항을 신설하면 실시율은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질이다. 사업주는 위험성 평가 결과에 상관 없이 법률이 정하는 수많은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정해진 교육시간을 채워야 하고 안전보건 전문가를 정해진 대로 선임해야 하고 작업환경측정을 규정대로 이행해야 한다. 어차피 정해진 대로 해야 할 거라면, 어느 사업주가 위험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그 크기를 적정하게 평가하려 하겠는가. 위험성 평가를 또 하나의 규제로 인식할 것이다.
영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사업주에게 노동자의 위험을 찾아 개선하도록 하고 그 조치방법을 스스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 일반의무는 사업주에게 주어진 의무의 거의 전부이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는다. 사업주는 위험을 찾아내지 못할까 봐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자율규제는 위험성 평가가 아니라 일반의무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업주에게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을 확보하도록 하는 포괄적 의무(위반 때 처벌)를 부여하고, 대신 다른 강행규정은 최소화해야 한다. 법체계는 그대로 놔둔 채 하위규정만 정비하려는 것은 앞뒤가 바뀐 꼴이다.
추진체계도 문제다. 규제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데는 엄청난 동력이 필요하다. 법 조항 몇 개를 개정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노사의 입장을 조율하고 국민의 공감을 얻기가 결코 쉽지 않다.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하고 노사정 대표로 구성된 논의기구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 내 전문가 티에프에서 논의하겠다는 구상은 규제방식의 대전환이라는 핵심을 놓친 데서 비롯한 안일한 발상이다.
또 하나 분명히 짚고 가야 하는 것이 ‘처벌과 예방’ 프레임이다. 자율규제는 처벌을 줄이고 예방에 힘쓰겠다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처벌이 예방을 촉진하기 위한 것임은 자율규제에서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사업주는 포괄적인 의무를 지게 되고 단순히 정해준 최소한의 기준이 아니라 적정한 안전보건조치를 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이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하는 일도 정부의 몫이다.
효용을 다한 규제방식을 바꾸려는 계획을 환영한다. 이제는 개혁의 방향과 핵심을 분명하게 정하고 이해관계자와 국민을 설득해나갈 강한 추진체계를 갖추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또 하나의 대책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