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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임신중지, 새로운 장벽은 안 된다 / 김정혜

등록 2020-10-12 13:51수정 2020-10-21 17:31

낙태죄 ‘완벽한 폐지’를 위한 숙의 ②

김정혜 ㅣ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지난 4월 ‘재생산건강보호법안’(Reproductive Health Protection Act)에 서명한 랠프 노덤 미국 버지니아주 주지사는 말했다. “대부분 남성인 리치먼드 입법자들은 더 이상 여성들에게 그들의 몸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인공임신중절 전 24시간의 강제 대기, 주 정부 기반의 상담 의무, 인공임신중절 클리닉 제한, 초음파 의무 등이 사라졌다. 기존의 상담 의무 조항 내용은 매우 상세했으며, 그저 의학적 정보를 충실히 제공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료 현장에서는 의사가 임신중지의 위험을 강조하는 편향된 상담을 하게 되었고, 이내 비판에 부딪히면서 상담 조항도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낙태죄 대체입법 시한이 다가오면서 우리 정부도 속도를 내고 있다.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낙태죄 폐지 권고가 무색하게, 지난주 입법예고된 정부안은 원칙적 처벌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임신 초기, 중기, 후기를 잘게 쪼개어 허용 요건을 달리하고, 임신중지를 하려는 여성에게 여러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런 형태의 입법은 해외 각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선진적 기준’인 것처럼 소개되어왔지만, 이제는 너무 낡았다. 임신중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준은 달라진 지 오래다. 새로 법을 개정하는 국가들도 더 이상 처벌과 제한에 집착하지 않으며, 여성의 판단을 존중하고 건강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9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자유권 규약 중 생명권을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당사국이 임신중지를 한 여성이나 의료인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점, “여성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현존하는 장벽을 제거해야 하고, 새로운 장벽을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일찌감치 인공임신중절 감소에서 안전성 확보로 눈을 돌렸다.

캐나다에선 1980년대에 이미 낙태죄의 효력이 상실되었다. 대법원에서 낙태죄에 위헌 결정을 내린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임신중지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있다. 임신 주수 제한도, 사유 제한도 없다. 주 정부나 병원이 상담을 제공하지만 강제하지 않는다. 상담은 임신중지의 요건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다. 세간의 우려와 달리 처벌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인공임신중절 건수는 줄어들고 있고 90% 이상이 초기에 행해지며 임신 20주 이후의 인공임신중절은 대부분 태아 기형 사유로 전체의 0.75% 수준에 불과하다. 처벌 규정을 없앴지만 인공임신중절이 만연하게 되거나 시기를 뒤로 미루는 ‘무분별함’은 일어나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임신중지는 온전히 의료행위다. 그렇기에 여성과 의사는 처벌의 위협 없이 가장 안전한 방법을 논의하고 선택할 수 있다. 정부는 다만 안전한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하도록 체계를 갖추고 비용을 지원하며, 전국에서 균등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다.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주마다 낙태죄를 대체하는 임신중지법, 재생산건강법 등이 제정되었다. 아예 “임신중지를 하려는 여성은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라는 조항을 명시하기도 한다. 빅토리아주의 경우 임신 후기 임신중지에 대한 제한 조항은 있지만 처벌은 하지 않으며, 후기에도 의료적 환경과 임신한 여성의 심리적·사회적 미래 환경을 고려하여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주는 임신한 여성이 원할 때라야 임신중지에 대해 상담과 정보를 제공하도록 한다. 임신중지가 의료 문제라는 점, 결정은 임신한 여성이 스스로 하도록 보장한다는 점을 반영한 입법이다.

낙태죄를 남겨두는 것은 임신을 중지하려는 여성에게 범죄자라는 이름표를 붙이겠다는 국가의 결단을 보여준다. 임신중지 전 상담 강제, ‘숙려기간’이라 불리는 강제 대기 기간, 다른 의료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 의사의 거부권 등은 국제인권규범에서 금지한 임신중지 접근성을 제한하는 장벽에 해당한다. 설령 요식적인 절차에 불과할지라도, 장벽들을 통과하는 동안 처방과 수술은 지연되고, 임신한 여성이 직면해야 하는 고통과 위험성은 높아진다. 접근성을 제한하는 모든 장벽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임신과 임신을 중지하려는 이유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허락을 구하는, 좁고 모욕적인 길을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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