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한 지역에 왕진을 간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의 양창모 센터장과 최희선 간호사. 염증이 생긴 환자의 팔에 드레싱을 하고 있다. 양창모 센터장 제공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박 할아버지의 심장 속에는 철로가 놓여 있었다. 슉슈욱. 증기기관차가 지나가야 날 법한 소리가 심장에서 들렸다. “아프고 나서는, 후… 너무 외로워.” 복용하고 있는 약을 가지러 안방을 다녀온 할아버지는 몇 마디 안 되는 말을 하면서도 중간에 숨을 골라야 했다. 10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를 다녀오는데도 숨이 찼다. 혹시나 해서 청진을 했더니 역시나 심잡음이 크게 들렸다. 건강한 심장에서는 결코 나지 않는 소리였다.
“어르신, 심장에 문제 있는 건 아세요?” “아니.”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병원 다녀왔다면서요?” “그랬지. 한달 동안 다섯 군데나 갔어. 엠아르아이(MRI)도 찍었어.” “만난 의사들 중에서 청진해본 의사가 없었어요?” “응. 한명도 없었어. 선생님이 처음이야.” 여쭤보니 숨찬 증상은 몇개월 전부터 있었다.
진료실 안에는 고속도로만 있고 의사는 직진만 한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의 원인을 빠른 시간 안에 최소한의 진료로 찾아내는 것이 실력 있는 의사다. 그러니 손가락 힘이 떨어져서 온 환자에게 청진기를 댈 이유는 없다. 할아버지의 심장병을 놓친 것은 실력 없는 의사를 만나서가 아니라 시스템에 잘 적응해 있는 의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환자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는 시진은 진찰의 기본 아닌가? 하지만 진료실 환경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는 최대한 빨리 환자용 의자에 도달해야 한다. 그 짧은 거리에서는 할아버지의 호흡곤란 증상이 유발되지 않은 것이다. 진료실이란 공간은 그렇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진료실 문에서 의자까지의 거리조차 아예 없애겠다는 제안이 요즘 나오고 있다. 바로 원격의료이다.
할아버지의 심장병은 진료실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사각지대는 왜 존재하는가. 속도 때문이다. 돈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한 빠른 진료는 필연적으로 사각지대를 발생시킨다. 원격의료는 그 효율성의 연장선에 있다. 그럼에도 원격의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동이 어려운 시골 어르신들을 ‘위하여’ 원격의료가 필요하다 얘기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 더 나은 해결책이 있다. 바로 공공의료를 강화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자체에는 원격의료 시범사업이라며 2년 동안 400억원이 넘는 돈이 지원되고 있다. 그들이 ‘위하여’를 강조하는 이유도, 그 ‘위하여’가 있어야 정부의 돈을 끌어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의 십분의 일만 있어도 이곳 시골 노인들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마을 진료소를 열고 방문진료를 체계화하면 된다. 진료의 목적은 의사를 빨리 만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만나는 데 있다. 의사가 마을로, 집으로 온다면 지금보다 훨씬 빨리 만나면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다.
원격의료는 병원에 접근하기 힘든 이들의 의료적 요구에 대한 의료산업의 대답이다. 그들은 시골 노인들과 장애인들의 고통 속에서 이윤이 될 요소를 발견해낸다. 기업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정부의 대답은 달라야 한다. 적어도 국민 세금을 사용하는 정부라면 산업의 요구가 아니라 의료공공성의 입장에서 답해야 한다. 의사와 환자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더 많은 접촉이다. 시골 노인이나 장애인처럼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고 다양한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할아버지는 ‘괴롭다’고 하지 않았다. “외롭다”고 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부재를 뜻한다. 아파서 손길이 필요할 때 아무도 와 닿지 않은 것이다. 그 가난의 자리에는 당연히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와야 한다. 가난을 언급하는 말은 많지만 가난한 사람의 말은 듣기 힘든 게 한국 사회다. 가난한 사람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가난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삶만 바뀌었을 뿐이다. 가난 산업에는 가난이 없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시골 노인들을 위한다는 원격의료엔 시골 노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