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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모든 게 ‘낯선 처음’인 눈

등록 2021-07-12 13:19수정 2021-07-13 02:37

이안 |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사계초등학교만 그런 줄 알았더니 덕수초등학교도 운동장에서 산방산이 떡하니 마주 보였다. 자연이 사람에게 미치는 정기라는 것이 있다면, 이 두 학교의 어린이들은 분명 산방산의 저 우람하고 묵직한 기운을 간직하며 자라날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을 마치고 1학년 어린이들에게 저자 사인을 해주다가 재미난 시를 만났다. 사인을 받으러 가져온 종이에는 ‘비가 와요’란 제목 아래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비가모왜요/ 비는하는래서래니는물이난다/ 엄마비가신기해요/ 나는엄마를시은날/ 엄마는밥볼때/ 나는비를본다니다”(정도영, 덕수초 1학년).

군 복무 시절 어머니가 보낸 편지가 꼭 이랬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상관없이 소리 나는 대로 꾹꾹 눌러쓴 삐뚤빼뚤한 글씨, 해독 불가의 낱말이나 구절들. 그런데 별 내용도 없는 편지에 매번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마음을 담아 쓴 형식 자체가 내용을 압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영이 시를 다시 읽어본다. “엄마 비가 뭐예요?/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란다/ 엄마 비가 신기해요/ 나는 엄마가 쉬는 날/ 엄마는 밥 볼 때/ 나는 비를 본답니다”. 비가 뭔지 궁금해하고 신기하게 여기는 마음이 나에게도 있었는데, 도영이 시를 읽으니 묻게 된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파블로 네루다). 도영이 문장은 “엄마”와 유착관계로 시작되다가 “나는 엄마가 쉬는 날”을 거치면서 “엄마는 밥 볼 때/ 나는 비를 본답니다”로 끝난다. ‘엄마=나’에서 ‘엄마/나’로 분리되는 것이다. 여덟 살 어린이의 성장 단계가 자기도 모르게 표현된 것이겠다.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치면 가능한 평균적인 시 말고 아주 예외적인 시가 나오는 것을 어린이 시 쓰기 교육 현장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분명 시인의 손을 거쳤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눈들이 말했다./ “우리 위에 눕지 마시오 우리가 눌려서 기절합니다.”/ 눈들이 말했다./ “우리를 뭉치지 마시오 싫어하는 눈들과 뽀뽀하기 싫습니다.”/ “우리를 먹지 마시오 우리가 녹아서 죽습니다.”/ 눈들이 말했다, 눈들이 말했다./ “우리를 건드리지 마시오!””

제주에 기록적인 폭설이 쏟아진 얼마 뒤인 2018년 2월24일, 제주 신광초 3학년 조아영 어린이가 쓴 ‘눈들이 말했다’란 시다. 큰따옴표, 반점, 온점, 느낌표 같은 문장부호의 사용, 반복을 통한 리듬과 의미의 강화, 대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 등 한 편의 시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구현되었다. 아영이는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 눈을 가졌을까.

“사람도 죽고.// 벌레도 죽고.// 꽃, 나무, 풀도 죽고.// 생명은 죽고 잊혀지고,// 다시 사람, 벌레, 꽃, 나무, 풀, 생명도 죽고// 다시 아름다운 하늘 속에 다시 일어나다”

역시 제주의 초등학교 2학년 김창우(가명) 어린이가 2019년 1월9일에 쓴 ‘생명은 죽어도 다시 아름다운 곳에 일어나다’란 시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가정폭력을 피해 피난시설에 입소해 있는 어린이였다. 아홉 살 어린이가 삶 저편의 죽음을 넘겨다보다니. 1연, 2연, 3연의 문장이 “죽고”와 마침표(.)로 끝난다. 4연에서 마침표는 반점(,)으로 바뀌고 5연에서부터 사라진다. 이것을 현생의 죽음에서 내생의 부활로 나가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심리와 호흡으로 읽어도 될까. 제목을 포함해 네 번 사용된 “다시”라는 말도 예사롭지 않다.

“모든 어린이는 시인이다”라는 말은, 모든 어린이가 시를 잘 쓴다는 뜻이 아니다. 시인처럼 본다는 말이다. 어린이는 “지금 막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의 눈으로”(이오네스코) 모든 걸 본다. 어린이에게는 보이는 모든 게 ‘낯선 처음’이니까. 모든 어린이가 시인은 아니지만 어떤 어린이는 시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쓰기도 한다. 잘 쓰려고만 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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