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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젠더팀에 ‘자의로’ 들어갔니?

등록 2021-07-22 17:06수정 2021-07-23 02:36

임재우 젠더팀 기자

지난해 말 인사로 부서를 젠더팀으로 옮겼을 때, “자의로” 옮긴 것인지 묻는 사람이 유독 많았다. 1~2년마다 출입처가 바뀌는 직업 특성상 부서를 옮기는 건 흔한 일인데, 유난히 자의로 옮긴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이들이 많은 게 특이했다. 지난해 11월 신설된 젠더팀은 주로 성평등·성차별·성소수자 인권 문제 등을 취재 영역으로 삼는다. 아마 내 의사로 젠더팀으로 옮긴 것이 맞는지 묻는 말의 저변에는 ‘당사자도 아닌 이성애자 남성이 왜 젠더 이슈를 취재하냐’는 인식이 깔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남성 기자’라서 받은 질문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기자직 동기 8명 가운데 남성은 나 한명이다. 수습 기간, 이런 선배 저런 선배를 만나 대면식을 치를 때, 유일한 남성 기자인 나를 걱정해주는 속 깊은 분들이 많았다. “남자가 혼자니까 동기들이 나가떨어지지 않게 잘 챙겨줘라.” “너만 남자라서 외롭겠다. 동기들이 괴롭히지는 않냐.” 처음에는 가벼운 농담으로 듣고 넘겼는데, 몇차례 반복되기 시작하니 동기들은 불쾌하고 나는 민망했다. 아마 남성 기자가 다수고 여성 기자가 한둘이던 시절에는 이런 식의 걱정 어린 말들이 없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성별의 차이’를 실감한 것은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뒤부터다.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 기사에 내 이름과 다른 여성 기자의 이름을 동시에 작성자로 적어 놓으면, 유독 여성 기자의 이메일에만 성적인 표현이 담긴 악성 메일이 가곤 했다. 분명 기사에는 내 메일 주소가 달려 있는데, 굳이 여성 기자의 이름을 검색해 악성 메일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일부 악플러들의 기이한 정성으로 여겼다. 몇년 지나 내가 ‘여성 기자’가 아니라서 피해 갔던 경험을 되짚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가령 취재원이 은근슬쩍 “아가씨”라고 부르며 성별로 낮잡아 보는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구미에 맞지 않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남초 사이트에 얼굴 사진이 박제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페미 기자’로 좌표가 찍혀서 무더기 악성 메일을 받아본 적도 거의 없다. 정치적 대립이 첨예했던 사건의 압수수색 현장에서 질문을 건네다 찍힌 사진으로 특정 진영의 지지자로부터 성희롱에 가까운 조롱을 당하는 일 역시 경험해보지 못했다. 다른 언론사보다 앞서가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취재원이 다른 마음이 있어서 술술 알려준 것일 것’이라는 모욕적인 비아냥을 들어본 적도 없다. 여성 기자가 아니어서 운 좋게 피해 갔던 일들로 당장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도 이 정도다.

다만 단 한번, ‘남성 기자’라는 이유로 취재 과정에서 손해를 본 적은 있다. 지금은 ‘혜화역 시위’라고 기억되는 2018년 6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때였다. 불법촬영에 분노한 여성들이 서울 혜화역 1번 출구부터 서울대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까지 800여m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데, 정작 취재를 나간 나는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다. 집회 참가 조건은 여성으로 제한되었고, ‘남성’인 이들은 기자를 포함해 모두 참가자들이 모인 폴리스라인 바깥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성별을 이유로 반드시 접근해야 했던 특정 공간에서 배제되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주최 쪽이 이것까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자체로 얼얼한 ‘미러링’이었다.

빙빙 답을 피해 왔는데, 결론적으로 젠더팀으로 부서를 옮긴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마초 집단에 가까웠던 이전 출입처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일하고 싶었던 자의가 절반, 젠더팀을 ‘여성만’으로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팀장의 타의가 절반 정도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성차별·성평등 문제는 내 주변 가장 가까운 동료들의 일이었고, 동시에 그들 곁에서 상대적 수혜를 누리는 나의 일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덧붙여 여성 기자가 다수라고 남성 기자 한 명을 못살게 굴어 쫓아내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따뜻한 걱정에서 나와 그들을 놓아줄 때도 된 것 같다. 이것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 끝.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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