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저녁 찾아간 서울 종로3가 서울극장 모습. 서정민 기자
서정민 ㅣ 문화팀장
‘설마 벌써 문을 닫은 건가?’ 예상보다 늦은 퇴근으로 영화 시작 한참 뒤에 도착한 영화관 앞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여러 출입구 중 딱 하나 열려 있는 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로비 또한 조용했다. 안내데스크를 지키던 어르신이 말했다. “왜 이리 늦게 오셨어요?”
서울극장이 이달을 끝으로 영업을 종료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달 초였다. 개관한 지 42년 만이다. 문득 20여년 전 어느 겨울날이 떠올랐다. 당시 갓 사귄 여자친구와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풋풋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스가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 현란하고 감각적인 엠티브이(MTV) 뮤직비디오 스타일로 고전을 재해석한 영화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극장을 나오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 시절 개봉 영화를 보려면 시내로 나가야 했다. 주요 개봉관은 서울 종로·을지로 등지에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중심은 종로3가였다. 서울극장·단성사·피카디리극장이 네거리 한 구석씩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대형 멀티플렉스가 곳곳에 들어서면서 전통의 극장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단성사는 2008년 문을 닫았고, 피카디리극장은 대형 멀티플렉스 직영관이 됐다. 그나마 버티던 서울극장마저 코로나19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 것이다.
서울극장이 31일까지 ‘굿바이 상영회’를 한다는 기사를 쓰면서, 아쉬운 마음에 나도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극장은 감사의 차원에서 당일 선착순 무료 티켓을 준다고 했지만, 돈 주고 예매했다. 최신작 대신 고른 영화는 <퐁네프의 연인들>. 프랑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시력을 잃어가는 여자와 노숙을 하는 남자의 핍진한 사랑을 그린 1992년 개봉작이다. 이미 본 영화지만, 서울극장에 작별을 고하기에 제격일 것 같았다.
영화의 3분의 2가 지났을 즈음 상영관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좌석 띄어 앉기’로 비워둔 자리를 빼면 맨 앞줄부터 맨 뒷줄까지 거의 차 있었다. 20대부터 머리 희끗한 노년까지 관객 나이대도 다양해 보였다. 자리 잡고 앉아 영화를 보면서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다 같은 마음이었어.’ 영화가 끝나고 불이 환하게 켜지고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관객들을 보며 다시 한번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곱씹어보면 영화관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보겠다고 모이는 곳 아니던가. 대형 스크린에 펼쳐진 ‘시네마 천국’에 빠져 함께 웃고 울다 보면 카타르시스 효과가 극대화되는 곳이 영화관이다. 요즘 티브이(TV)도 커지고, 아이피티브이(IPTV)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덕에 집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지만, 내 경험상 극장에서의 몰입도와 감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바깥에 나오니 거리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오징어, 쥐포 등을 팔던 노점상도 철수하고 없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만난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참 전에는 장사 잘됐지. 근데 점점 손님이 줄더니, 이젠 아예 문 닫게 생겼어.” 휴대전화로 서울극장 사진을 찍던 한 20대 여성은 “오늘 처음 왔다. 사라지기 전에 왠지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서울극장만이 아니라 영화관 전체가 위기를 맞았다. 이러다간 세상의 모든 영화관이 ‘굿바이 상영회’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상상하기도 싫다. 사실 마스크를 쓰고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는 영화관은 식당·카페·술집에 견줘 훨씬 안전하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다녀갔어도 감염된 사례는 한건도 없다. 지금 상영 중인 <모가디슈>와 18일 개봉하는 <인질>이 참 좋다. 전직 영화 담당 기자로서 보장한다. 훗날 ‘굿바이’ 하며 아쉬워하지 말고, 지금 그 감흥을 느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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