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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한국언론과 ESG 경영

등록 2021-08-18 08:03수정 2021-10-15 11:21

기후환경 분야 정상회의로 5월 말 열린 ‘2021 피포지(P4G) 서울 정상회의’에 깜짝 등장한 ‘김갑생할머니김’의 이에스지(ESG) 경영 선포 영상. 시가 총액 500조원, 코스피 1위의 가상기업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은 기업이 맹목적 이윤 추구에서 벗어나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며, 투명하고 윤리적인 지배구조를 갖춰 지속가능한 성장을 실현하는 것이 이에스지 경영이라 설명한다. 행사를 홍보하기 위해 정부가 개그맨들에게 의뢰해 제작한 이 영상은 기후·생태위기 시대 기업의 나갈 길을 알기 쉽게 제시해 큰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 올라온 영상 갈무리
기후환경 분야 정상회의로 5월 말 열린 ‘2021 피포지(P4G) 서울 정상회의’에 깜짝 등장한 ‘김갑생할머니김’의 이에스지(ESG) 경영 선포 영상. 시가 총액 500조원, 코스피 1위의 가상기업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은 기업이 맹목적 이윤 추구에서 벗어나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며, 투명하고 윤리적인 지배구조를 갖춰 지속가능한 성장을 실현하는 것이 이에스지 경영이라 설명한다. 행사를 홍보하기 위해 정부가 개그맨들에게 의뢰해 제작한 이 영상은 기후·생태위기 시대 기업의 나갈 길을 알기 쉽게 제시해 큰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 올라온 영상 갈무리

알파고가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 학부모들은 “인공지능(AI) 시대에 우리 아이가 어떤 직업을 택하면 좋을까” 물었다. 몇해가 지나자 질문은 더 절박해졌다. 길어야 30년.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성장이 끝나고, 지구와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장래는 어떤 모습이겠냐는 것이다. 기후·생태위기와 악화하는 불평등 아래 ‘지속가능성’은 모두의 삶을 강하게 규율할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기업은 변화의 냄새를 일찍 맡는다. 지난해부터 부는 ‘이에스지(ESG) 경영’ 열풍은 기업이 체감하는 지속가능성의 위력을 보여준다. 환경·사회·지배구조의 영어 약자인 이에스지는 매출이나 이익 등 재무지표 외에 탄소배출량, 산업재해율, 이사회 독립성 같은 비재무지표도 측정해 공표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스지 경영은 결국 기업시민으로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존중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감염병을 계기로 투자자와 소비자, 직원들이 달라지는 게 보이고, 유럽의 ‘탄소국경세’처럼 국제규범이 속속 등장하자 기업은 이에스지를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언론사도 기업인 만큼 무풍지대에 있지 않다. 한 예로 김현대 <한겨레> 대표는 최근 국·실장 회의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는 등 회사가 할 수 있는 이에스지 경영 실천 방안을 유관 부서가 마련해보라”고 당부했다. 사실, 이에스지라 부르지 않았을 뿐 사회책임경영은 한겨레에 낯설지 않다. 창간과 동시에 윤리강령을 마련해 실천해왔고, 지배구조도 투명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성 평등 및 일·가정 양립을 추구해 ‘남녀고용평등 우수기업’으로 지난해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편집국에 기후변화팀을 창설하는 등 지속가능성을 북돋우는 보도에 힘썼다.

물론 공적 책무를 가진 언론을 이에스지로 규율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질문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도 이에스지가 유효한 이유는 한국 언론이 기업으로서 지켜야 하는 기본마저 무시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닿지 않을 신문을 매일 수십만부씩 찍어 지국에 떠넘기는 낭비와 불공정 관행, 프리랜서라는 허울 아래 벌어지는 방송사의 비정규직 착취. 논조를 쥐락펴락하는 제왕적 언론 사주, 클릭 수를 노려 쏟아내는 소음에 가까운 기사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한겨레 시민편집인이기도 한 김민정 한국외국어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는 지난해 10월 <기자협회보>에 쓴 칼럼에서 “발행 부수, 시청률, 클릭 수, 광고 수익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 언론사를 평가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뉴스의 특수성을 고려해 취재·보도 윤리규정 준수 정도를 점수화하는 등 확대된 이에스지 지표를 도입하자는 의견이다.

‘나쁜 짓 안 하기’나 ‘기본 지키기’도 중요하지만 이에스지 경영은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궁극적 지향점은 기업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경제적 기회도 포착하는 공유가치 창출이다. 리베카 헨더슨 하버드대 특별교수는 “진정성 있는 목적의 추구는 강력한 비즈니스 전략이 될 수 있다”며 기업을 둘러싼 시스템 구성요소의 관계를 바꾸는 ‘아키텍처 혁신’을 공유가치 창조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밀가루 회사 ‘킹 아서 플라워’는 ‘빵 만들기를 통한 공동체 형성’으로 사명을 재정의하면서 회사가 완전히 달라졌다. 차별화가 어려운 밀가루를 만들어 파는 데 머물지 않고,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제빵 기술을 전수하는 등 따뜻한 ‘경험을 파는 기업’으로 변신했다. 이를 위해 홍보, 마케팅, 공급망 관리를 전면 재구성했다. 그 결과 매출이 매년 7%씩 증가하고,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77만명에 이를 만큼 고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언론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하지만 늘 부족한 자원인 ‘신뢰’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믿음이 가는 보도를 꾸준히 해 독자의 신뢰를 쌓고, 이 사회의 신뢰 수준도 함께 높인다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조직도, 일하는 방법도, 독자와의 관계도 달라야 할 것이다. 한겨레는 지난 5월 후원회원제를 도입했는데 독자의 신뢰가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사업 모델이다. 한국 사회 ‘신뢰제작소’란 사명을 스스로 부여하고, 취재·보도 방식, 인력 관리, 독자와의 관계를 바꾸어가는 것이 이에스지 관점에서 본 한겨레의 혁신일 것이다. 저널리즘책무실장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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