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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억 아파트와 작은 사실 하나 [슬기로운 기자생활]

등록 2021-08-20 04:59수정 2022-08-22 13:56

[슬기로운 기자생활] 이정규

한겨레21부 취재2팀 기자

한달도 채 안 된 기간 동안 일반기업에 다닌 적이 있다. 29살에 인터넷 서점이라는 첫 정규직 직장을 얻었다. 감격에 겨운 부모님은 서울로 올라와 격려해줬다. 그런데 일요일 저녁이면 심장이 콩닥거리고 아팠다. 이유는 출근하기 싫어서. 반복업무를 해야 했다. 책 데이터를 정리하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는 선임자의 엑셀 작업을 보고 회사를 관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저렇게 빠르게 엑셀을 할 수 없어’ 무서움에 사로잡혔다. 다시 한번 제대로 준비해보자는 판단에 퇴사했다. 인턴기자도 해봤으니까. 대학 새내기 때의 꿈, 언론인. 사직서를 냈지만 회사를 떠나기 무서워 14층 사무실에서 걸어 내려온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운이 좋게 기자가 됐다. 일요일 저녁, 심장이 몹시 아프진 않다.

지난 일요일엔 문득 한 동네를 찾았다. 옛 취재 기억이 서린 서울 서대문구의 한 재건축 지역이었다. 2년 전부터 공사 중인 땅은 3m가 넘는 방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맞은편에는 검게 때 탄 목욕탕 간판이 달린 38년 된 건물이 보였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과 벽 사이에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한 골목이 났다. 공사장에는 다 지어지면 한 채당 20억원은 될 거라는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 어딘가에 잊을 수 없는 한 청년이 살았다. 그는 강제집행으로 어머니와 함께 10년 동안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홀로 살던 빈집에서 또 밀려났다. 추운 겨울날 사흘 동안 길거리에서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돌아다녔다. 그는 2018년 12월4일 오전 차가운 한강 다리 밑에서 더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재개발이 아니라 재건축이라는 이유로 세입자 보상을 받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임대아파트를 달라. 유서에 적힌 그의 말이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철거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득하면서도 어쩌면 뻔한 생애사와 갈등을 취재하는 일이 당시 수습기자인 내게 주어졌다. 경찰서 담당 기자는 관할 지역에서의 주요 사건사고를 파악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시민단체의 보도자료를 통해 알았다. 부끄러웠다. 아침부터 어머니를 찾아 활동가들의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헛수고였다. 기자회견이 열리기 1시간 전에 도착해 ‘작은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활동가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

기사 제목은 ‘영정사진도 남기지 못한 한 철거민의 죽음’이 됐다. 청년의 주민등록증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쓰였다. 3번 강제집행을 당한 끝에 그에게 남은 것은 옷가지가 든 가방이 전부였다. “사소해 보이는 게 전체를 함의할 때가 많아. 흔적도 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저만큼 대변하는 상징도 없고….” 수습기자의 보고를 받아 기사를 쓴 선배가 말했다. 앞으로도 잘하자, 듣고 다짐하며 한겨레에서 일한 지 햇수로 4년이다. 스스로 묻는다. 난 기자로서 능력이 있나. ‘기레기’에서 더 나아가 ‘기렉시트’라는 말이 유행한다. ‘기자’에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 사건을 의미하는 ‘브렉시트’가 합쳐졌다. 언론을 떠난다는 그들처럼 나도 이곳을 떠나야 하나. 언론이 사양 사업이 됐고 내가 바라던 한겨레도 그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기자라서 다행이야. 이런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회사는, 실패하더라도 충분히 취재할 시간을 준다. 대부분에게 잘 보이지 않던 작은 사실을 찾을 기회가 생긴다. 음악가 이상순은 의자를 손수 만들 때, 의자 밑도 사포질했다고 한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왜 신경 쓰냐는 아내의 질문에 “내가 아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나 역시 남들은 잘 알아채지 못해도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는 순간을 만들려 애써본다. 궁금해하고 묻고 글을 써서 돈을 번다니. 아직은 나쁘지 않다. 늙어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묻고 쓸 수 있다면. 그런 기자가 된다면, 그런 직장이 된다면, 그런 업계가 된다면. 일요일 저녁, 아주 가끔 저 생각을 되뇐다.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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