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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 집을 두고 어디로?

등록 2021-08-29 21:56수정 2021-08-30 02:35

[서울 말고]

권영란|진주 <지역쓰담> 대표

“보상은 필요 없다, 내 집에서 살고 싶다. 삶의 터전 앗아가는 진주시장 물러가라.” 동네 골목에 내걸린 펼침막이다. 어느 집 담벼락에는 “진주시장 공약으로 진주시민 녹아난다”, 어느 집 대문에는 “나를 묻고 빼앗아 가라!”가 펄럭댄다. ‘내 집’을 지키려는 절박함이 늦여름 폭우에 간신히 걸려 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의 서랍에는 아버지 이름 석자를 새긴 문패가 있었다. 집이 없는 아버지의 문패는 오랫동안 셋집을 떠돌 때도 이삿짐 깊숙이 따라다녔다. 언젠가는 집을 갖고 언젠가는 대문 옆에 버젓이 달 것이라는, 아득한 별 같은 간절함. 어디 내 아버지만이었을까.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식들 무사히 키워내고 집 한칸 장만하는 데 평생을 걸었다.

진주시 남강변 망경동 주민들이 그랬다. 대지 30평, 40평도 채 되지 않는 집이지만 대부분 1970년대 남강둑 정비사업 후 간신히 마련한 ‘내 집’들이다. 집은 낡고 주인은 병들었지만 수십년 살아내는 동안 제 몸에 맞춘 옷처럼 딱 맞는 듯하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억척을 떨며 한 시절을 보냈고, 자식들을 키워 떠나보냈고, 노년에 이르렀다. 집집마다 사정은 좀 달라도 낮은 처마와 골목을 맞대고 오랜 세월 동기간처럼 살아왔다.

오랜 평화로움은 한순간에 깨졌다. 진주시가 지난 4월 이곳 망경동 남강변에 다목적문화센터를 짓겠다고 발표하면서다. 아름다운 남강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은 진주성과 촉석루가 있으니 반대쪽인 망경동에는 진주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번듯한 건축물을 올리겠다는 발상이다. 조규일 진주시장은 진주시 백년대계를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라 강조했고, 지역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중소 규모의 공연장, 전시실, 문학관 등을 넣을 예정이라 했다.

진주시는 다목적문화센터 건립을 중심으로 이 일대 주거환경 개선사업과 강남지구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사업 예정지의 80%가 주거밀집지역이라 54가구를 이주시키고 철거해야만 이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사업 예정지 도로 확포장 대상지를 더하면 훨씬 더 많은 가구가 해당된다. 거기다 주민들은 진주시가 사업 예정지 해당 주민들과 사전에 협의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진주시는 제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하지만 용역보고서나 해당 부처 승인 등은 추진 절차일 뿐 사업 타당성 여부를 반영하지 않는다. 사업 절차 중 하나인 ‘주민 협의’도 편법 또는 임의 작성이 가능하다.

사실 이 사업은 조규일 진주시장이 2018년 지방선거 후보로 나왔을 당시 공약사업인 ‘부강진주 3대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진주시장은 아마도 내년 선거 전에 망경동에 첫 삽을 뜰 계획일 게다. 하지만 ‘그놈의 선거공약’이란 게, 대부분 선거캠프에서 어떤 타당성이나 검증 작업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아이디어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당선만 되면 무리하게 추진하고 공약 진행 여부를 다음 선거의 치적으로 내세운다.

시·군 단위의 기초자치단체에서 시장·군수는 제왕적이다. 주거환경 개선사업은 노후·불량주택 정비보다는 철거사업이 됐고, 구도심을 유지하며 활성화하겠다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여전히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머물러 있다. 진주시는 토박이 주민들을 내몰고 동네를 없애고 그 위에 어떤 문화예술을 하겠다는 것인지…. 엇비슷한 현실은 진주만이 아닐 게다. 지방의회나 지역 언론은 의무 방어전만 할 뿐 지방정부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망경동 주민들에게 집이란 ‘온 생애’이다.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는 척도가 아니라 자고 먹고 쉬는 곳이고, 자식들이 찾아오는 곳이고, 이웃이 있는 곳이다. 이들에게 ‘내 집’은 그저 동네의 일부이다. 주민들은 왜 내 집에서, 내 동네에서 쫓겨 가야 하는지 그저 억장이 무너진다.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골목길 펼침막에는 “우리 집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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