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석 국회의장(가운데)과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31일 국회의장실에서 언론중재법 처리 문제에 관해 합의한 뒤 합의문을 보여주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안재승 논설위원실장
여야의 극한 대립으로 치닫던 ‘언론중재법 사태’가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31일 언론 전문가들도 참여하는 ‘8인 협의체’를 구성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논의하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이참에 여야에 당부한다. ‘8인 협의체’에 얽매이지 말고 한 발 더 나아가 국회에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 언론중재법뿐 아니라 공영방송 지배구조, 포털의 뉴스 서비스, 유튜브의 가짜뉴스 범람,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등 언론 현안들을 충분하고 깊이 있게 논의해 개선 방안을 마련했으면 한다. 뜻있는 언론인들과 시민사회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지난 한달여 동안 언론중재법 처리 문제가 극도의 혼란 양상을 보인 데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대안 제시 없이 반대만 해온 국민의힘도 잘못이지만, 무엇보다 ‘나만 옳다’는 식의 독선적 모습을 보인 민주당의 잘못이 더 크다.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언론자유운동을 벌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강제 해직되는 등 평생 언론자유를 위해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은 언론계 원로들의 충심마저 민주당은 외면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이 23일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강행 처리를 중단하고 사회적 합의에 나설 것을 촉구했지만, 민주당은 이틀 뒤 법사위 통과를 밀어붙였다.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와 관계없이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시대적 과제인 언론 개혁을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중재법 사태의 본질이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언론 자신에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라는 언론에 대한 타율적 규제가 논의되는 작금의 현실은 국민 불신을 자초한 언론에 그 책임이 있다. 지난 한달 동안 대다수 언론들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언론 재갈 물리기’, 언론중재법은 ‘반민주적 악법’이라는 보도를 수없이 쏟아냈는데도, 유력 여론조사기관들의 조사 결과를 보면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필요하다는 국민이 여전히 많다. 언론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조항을 그대로 둔 채 언론중재법을 통과시키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허위·조작 보도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 구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데 국민들은 동의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준다 .
극히 일부 언론을 빼고는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 반대만 부각시켜 보도했지만, 사실 자유언론실천재단의 기자회견문은 언론에 대한 질타로 시작된다. “우리는 우선 현재의 혼란스런 언론 상황을 만든 첫번째 책임은 현장의 언론인과 주류 언론사,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편집인협회, 방송협회 등 언론계 자체에 있다고 판단한다. 디지털 환경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고 그 속에서 언론의 폐해가 드러난 지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음에도 기존의 언론계 주체들은 그에 대한 해결책은커녕 그런 환경에 편승해 극단적인 상업주의와 진영 논리에 빠져 이러한 상황을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이득을 위해 악용해왔기 때문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부끄러움을 느껴야 정상 아닌가.
오죽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자는 법안이 나오고 국민 다수가 찬성하는지, 언론이 먼저 성찰하고 자정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도 한국신문협회를 비롯한 다수의 언론단체들이 지난 한달 동안 발표한 많은 성명과 기자회견문을 보면 언론의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대한민국을 다시 군부독재정권과 같은 어두운 과거로 되돌리는 짓” “헌정사에 오점을 남기는 죄악” “민주주의 근간인 언론자유를 말살하는 법” 등 거칠고 과장된 주장이 난무했다. 언론단체라는 이름이 민망할 지경이다.
이런 가운데 나온 언론현업 5단체의 목소리는 반가웠다. 방송기자연합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한국피디연합회는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의 책임과 신뢰 강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와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들 단체는 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 방침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동시에 언론의 잘못을 돌아보며 대안을 제시했다. “언론현업 다섯 단체는 언론중재법 개정안 논란 과정에서 표출된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의 비판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다. 조회 수에 매달린 천박한 기사, 사주의 이익을 위해 사실에 침묵하고 왜곡한 기사, 정파적 보도로 정치 양극화를 더욱 부추긴 기사 등은 법과 제도로 처벌해 사라질 문제가 아니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신문, 인터넷신문, 지상파 방송, 유료방송채널, 네이버와 카카오 등 인터넷뉴스서비스사업자, IPTV 사업자, 언론현업단체, 언론·법 학계 및 언론시민단체들이 추천하는 위원으로 구성된 ‘저널리즘 윤리위원회’(가칭) 를 제안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실효성 없이 겉돌았던 미디어 시장 전반의 자정 기능을 제대로 작동케 하고, 저널리즘의 옥석을 가려내 시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 언론중재법 개정에 대안 없는 반대만 외칠 것이 아니라, 언론 사용자단체와 미디어 사업자들은 시민들의 엄중한 문제 제기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제안에 즉시 호응하기 바란다.”
언론현업 5단체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이번 제안을 반드시 실행에 옮기기 바란다. 아직 늦지 않았지만 더 늦어지면 희망이 없다. 언론사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사주들도 힘을 실어주었으면 한다. 바닥까지 추락한 한국 언론이 신뢰를 되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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