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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동인권과 근로권익

등록 2021-10-31 17:15수정 2021-11-01 02:32

[서울 말고] 박주희ㅣ‘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드디어 대구에도 청소년 노동 인권 조례가 생겼다. 최근 서구의회가 지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조례는 자치단체장이 일하는 청소년들에게 노동 인권 교육과 실태조사, 상담을 하는 등 청소년 노동 인권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담고 있다. 특히 특성화고에 다니는 청소년에게 관련 교육을 먼저 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 눈에 띈다.

그런데 정작 조례 어디에도 노동과 인권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명칭부터 ‘청소년 근로권익 보호 및 증진 조례’이다. 조문에도 노동과 인권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근로와 권익이 있다. 이에 대해 조례를 대표발의한 이주한 서구의원은 ‘인권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반대 단체들이 심하게 반발해 근로와 권익이라는 표현으로 바꿨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간의 우여곡절을 보면 조례 제정을 위해 불가피한 절충안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전국 광역·기초자치단체 71곳에서 청소년 노동 인권 조례를 시행하는 동안 대구 지역 의회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조례 제정을 미뤄왔다. 근로기준법으로 충분하다, 반기업 정서를 일으키고 사업자의 투자 의욕을 위축시킨다는 등의 이유를 댔다. 조례가 청소년의 학습권을 침해한다는 억지 논리까지 폈다. 심지어 인권이 사회주의 개념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여기에 반대 단체들의 거센 항의는 조례 제정을 미루는 명분이 됐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 서구의회가 ‘인권’을 ‘권익’으로 고친 조례안을 발의하자 항의 문자 한 통 없이 통과됐다. 비슷한 시기에 중구의회가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발의한 ‘청소년 노동 인권 보호 및 증진 조례안’은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노동과 인권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달 초 현장실습 나온 특성화고 3학년 학생이 불법적인 잠수 작업을 하다 숨졌다. 아까운 청춘의 억울한 죽음은 일하는 청소년을 지키기 위해 어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뼈아프게 확인시켰다. 첫 조례 제정을 계기로 지역 시민사회는 대구시의회와 다른 기초의회도 청소년 노동 인권 조례와 노동 및 인권 조례 제정에 적극 나서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의 선례를 들어 다른 시·군도 노동 대신 근로를, 인권 대신 권익으로 바꿔 조례안을 마련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표현은 양보하더라도 조례 제정이 우선이라는 논리가 힘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근로와 노동은 단순한 표기 차이가 아니다. 남미정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는 한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구분했다. “근로와 근로자는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의 요구가 반영된 용어이다. 그 시대의 노동자는 산업화 역군으로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보다는 부지런한 근로를 요구받았다.” 권익과 인권도 마찬가지다. 권익은 권리와 그에 따른 이익을 뜻하고, 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권리이다. 인권은 권익보다 보편적이다. 시대의 흐름과 조례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이 조례는 근로 권익이 아닌 노동 인권 조례일 수밖에 없다.

대구시는 최근 ‘미래 인재도시 대구’ 선포식을 열고 2026년까지 미래 인재 3만명을 양성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사람을 키워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인한 지역기업과 지방대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인재가 모이는 혁신도시를 만들어 한국인이 가장 살고 싶은 국내 도시 3위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도 내놓았다.

지역의 합리적인 시민들은 묻는다.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하고 인권을 인권이라 부르지 못하는 곳에서 어떤 잣대로 사람을 키우겠다는 것인지. 대구가 원하는 인재는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성실한 산업화 역군은 아닌지. 보편적 인권 개념조차 부정하는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지역에 어떤 젊은 인재들이 모일 것으로 기대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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