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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피고소인 대한민국 언론사

등록 2021-11-18 19:53수정 2021-11-19 02:33

심우삼|정치팀 기자

가슴에 품은 사표가 품을 떠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햇수로 5년 차에 접어든 제 동료 기자들의 얘기입니다. 오죽하면 브렉시트에 빗대 ‘기렉시트’라고 합니다. 밖에서 볼 땐 여전히 선망의 직장으로 꼽히는 대형 언론사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탈출은 지능순’이란 우스갯소리는 회사를 가리지 않습니다. 합격만을 꿈에 그리며 수백 대 일의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열정과 간절함은 희미해지고 냉소와 자기 비하가 커집니다. 하여 ‘대한민국 언론사’ 전체를 상대로 고소인 불명의 ‘고소장’을 써볼까 합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고소인은 다음과 같이 피고소인 ‘대한민국 언론사’를 고소하오니, 법에 따라 조사하여 처분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소인은 2010년대 이후 대한민국 신문·방송사에 입사했습니다. 쌓은 것도 없이 소진부터 시켜야 하는 ‘마이너스 통장’과도 같은 삶이 시작됐습니다. 뉴스룸에 인력이 부족해 저연차 기자들에게 업무가 집중됐습니다. ‘너만의 기사’를 쓰라고 닦달하면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세상일도 빼먹지 말고 챙기라 했습니다. 일당백이 되라는 주문에 있는 능력 없는 능력까지 끌어모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불가능한 미션을 완수하지 못한 자괴감과 패배감은 오로지 고소인의 몫이었습니다. 입사 때와 비교해 고소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결산해보면 적자도 이런 적자가 없습니다. 조금 더 빨리 기사를 쓸 수 있게 됐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취재할 수 있게 됐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하루하루 허덕이는 삶에 요령이 아닌 전문성을 키우는 일은 달나라 여행마냥 요원한 일이 됐습니다. ‘프로페셔널’을 가장한 ‘아마추어리즘’에, 발전보다는 도태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피고소인은 변화에 뒤처져 고소인의 성장을 방관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피고소인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게으른 ‘인력 양성 시스템’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십년 차 부장 기자가 과거 받았던 수습기자 교육과 오늘날 신입사원들의 수습기자 교육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마저도 수습 딱지를 뗀 뒤로는 언론사 차원의 직무교육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여전히 수습기자들은 경찰서를 돌며 사건을 수소문하고 다닙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 52시간제의 시행으로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없어졌다는 것 정도가 있겠습니다.

취재 방법론도 기사 작성법도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독자들은 사라지고, 콘텐츠의 문법도 변해가고 있는데, ‘위기감’만 팽배할 뿐 기존 방식을 쉽게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언론사가 ‘디지털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정작 디지털 경험이 일천한 내부자들끼리 머리를 맞대서 나오는 결과물은 ‘공자님 말씀’에 가깝습니다. 일부 피고소인은 자극적인 커뮤니티발 이야기로 조회수 높이는 것을 묘수로 여깁니다. 기자들을 ‘기레기’로 내모는 것이 과연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피고소인은 내로남불 태도로 고소인에게 큰 실망을 안겼습니다. 피고소인이 비판 보도에 들이대는 잣대와 내부의 문제에 들이대는 잣대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습니다. 성비위 가해자의 철저한 처벌을 요구하는 기사가 연일 지면과 뉴스를 채우고 있는데도, 정작 내부의 성비위 문제에 대해선 관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높은 수준의 감수성을 요구하면서, 아랫사람에게 막말하는 상사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격입니다. 피고소인이 ‘꼰대’를 비판하는 것도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체계의 빈자리를 위계가 대신하는 언론사야말로 가장 ‘꼰대’스러운 조직 아니던가요.

피고소인은 동료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소인은 빈자리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고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고민도 슬픔도 불안함도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이 고소장은 제출용이 아닌 공표용입니다. 부디 언론계를 떠나는 많은 이들의 답답함을 헤아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wu3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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