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쓸모의 세계에 사로잡히다

등록 2021-12-16 15:48수정 2021-12-17 02:32

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밥을 벌어다 주지도 않는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 툭 건드리는 것뿐이다. 정용일 선임기자
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밥을 벌어다 주지도 않는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 툭 건드리는 것뿐이다. 정용일 선임기자

이지혜 | 경제팀 기자

얼마 전 신문사 근처에서 회사 선배들과 술을 마시다 시인을 꿈꾸던 나의 대학 시절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꽤 많은 기자는 한때 문학을 꿈꾸던 사람들이다. 나도 대학 학보사에 시 네편을 응모해 최우수상을 탄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얘기를 꺼내며 농담 삼아 ‘준등단’이라고 으스댔더랬다. 사실 진짜 등단도 아니거니와 그 뒤로 시를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무용담 축에도 못 끼는 옛날이야기다.

대학 시절 나는 정말 시인이 되고 싶었다. 기자 되기를 열망했다면 시는 갈망했다. 다들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릴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하는 시 창작 수업에 열심히 다니며 시에 매달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그 계절 뼈 시리도록 싸늘한 공기와 쪼그라든 자존감으로 비참했던 기분이 따라온다. 합평(서로 읽고 평하기) 시간에 만난 너무나 특출난 사람들이 시어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며 시에 대한 나의 짝사랑을 단념하고 말았다는, 슬프지만 흔한 사연.

그때 나는 시의 쓸모없음을 사랑했다. 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밥을 벌어다 주지도 않는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 툭 건드리는 것뿐이다. 쓸모의 세계에서는 한심한 성과다. 하지만 쓸모 있어야만 인정받고 아니면 버려지는 것들로만 삶이 온통 채워져 있을 때, 그 형편없는 쓸모없음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는 것이다.

그날 회식을 마치고 내가 사는 세종시로 돌아오는 길에 학보사에 냈던 내 시를 오랜만에 클라우드에서 꺼내 읽었다. 조용히 시를 읽다가 버스에서 제때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오송역행 기차까지 놓쳤다. 단 5분간의 회상으로 순식간에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춥고 쓸쓸해졌는데,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시인은 못 되어도 꼭 좋은 독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날 나는 그냥 ‘시 못 읽는 기자’가 되어버렸다. 시를 잊은 것뿐만 아니라 되레 그 반대편으로 멀리멀리 떠나온 것만 같다. 언론사는 철저하게 쓸모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매일매일 가장 쓸모 있는 뉴스를 골라 취재하고, 그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대목을 기사 맨 윗단으로 올린다. 그렇게 모인 기사 중에서도 가장 쓸모 있는 것을 지면 맨 앞에 배치한다. 신문을 만드는 매일의 공정 굽이굽이마다 ‘쓸모’라는 잣대가 서려 있다.

가만히 요즘 내가 다룬 단어들을 되짚어봤다. 국내총생산이니 국가채무니, 국고채 이자상환금액을 과다 추계한 기획재정부가 어쩌고…. 지출 구조조정에 장기채 이자율에…. 모두 엄청 중요한 문제들이지만 너무 쓸모만 있어서 차갑다. 이 언어들에는 단어 하나에 뜻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 괜한 확장성을 가졌다가는 혼선만 초래한다. 재치도 상상력도 필요 없다. 그렇게 재미도 없는 언어로 써대는 내 기사들이 시와 달리 세상을 바꾸거나 큰돈을 벌어다 주느냐 하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어이없을 따름이다.

너무 고단할 때는 의식적으로 시집을 꺼내 들지만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내 책상 위에는 사놓고 읽지 못한 경제 서적들만 죄책감이 되어 쌓여 있다. 이젠 기사 쓸 때 필요한 자료가 아니면 잘 읽히지도 않고, 그마저도 필요한 부분만 발췌독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감을 앞두지 않으면 집중력도 떨어진다. 쓸모의 세계에 사로잡힌 것이다. 사회생활 5년 만에 이렇게 내 삶은 척박해져 가는 걸까.

나는 사람에게 쓸모없음의 세계가 하나씩은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꼭 문학이 아니어도 좋지만 아무 기능 없이, 얻을 것 하나 없이, 그냥 하는 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에 대해서도 ‘과연 나는 쓸모 있는가’라는 잔인한 질문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지혜라는 사람이 하나의 기사라면 나는 몇번째 면에 원고지 몇장짜리로 들어갈까. 지면에 들어갈 순 있을까. 이번 주말에는 서점에서 시집을 좀 사와 읽어야겠다. ‘시 읽기’에서마저 쓸모를 찾는 사람이 되기 전에.

godot@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그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뉴스룸에서] 1.

그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뉴스룸에서]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2.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3.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윤석열 부부가 모르는 것 한가지 [강준만 칼럼] 4.

윤석열 부부가 모르는 것 한가지 [강준만 칼럼]

‘지옥에서 온 판사’ 잘나가는 이유 [홍성수 칼럼] 5.

‘지옥에서 온 판사’ 잘나가는 이유 [홍성수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