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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나도 모르는 나

등록 2021-12-23 18:14수정 2021-12-24 02:31

김혜윤 | 사진뉴스팀 기자

일신상의 이유로 이별 노래만 듣고 있다 . 재생 목록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노래 가운데 ‘니가 알던 나는 이젠 나도 몰라 ’라는 가사의 곡이 있다 . 이 노래를 들으면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 한 장면이 있다 . 2015년 초 청계천의 한 카페에서 나를 앉혀두고 달력을 그린 다음 직접 공부 계획을 짜주던 그와 그 옆에 앉아 있는 나 . 교양수업에서 알게 된 그는 당시 나와는 달랐다 .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다 . 당시 난 닥치는 대로 살았고 ,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 이런 내가 답답한 듯 그는 데이트를 하다 말고 토익 등 내 공부 계획을 짜줬다 .

바로 다음해 , 나는 스스로 계획을 짤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됐다 . 사진기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나니 일단 달려야 했다 .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 대책 없이 전공수업을 하나도 듣지 않아 복학해서 매 학기 최소 20, 최대 22학점을 들었다 . 6년째 동결인 용돈만으로 살 수 없어 아르바이트를 했다 . 동아리와 학보사 활동도 했다 .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 하루 계획을 분 단위로 짰다 . 생활 습관이 1년 전과 비교해 완전히 바뀌었다 . 계획 없인 불안했다 .

계획 없는 하루가 불안하고 계획이 어긋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 . 이런 성향 탓에 언론사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기자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 퇴근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하루를 몇번 보내다가 든 생각이었다 . 내일 내가 어떤 현장에 가서 뭘 취재할지 모르는 채 잠들었다. 식사 중 ‘밥 먹고 어느 현장에 가라’는 전화를 받은 다음날부터 불안해서 허겁지겁 먹는 습관이 생겼다. 하루 계획을 짜놓아도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아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

다음날 일정을 미리 알아보는 일이 해답이었다 . 몇번 당직을 하고 나서 ‘당직하면서 다음날 일정도 찾아보고 올려야 한다 ’는 말을 들었다 . 그때부터 당직이 아닌 날에도 다음날 어떤 일정이 있나 살펴봤다 . 대략적으로 어떤 일정이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지니 다음날이 예상 가능했다 . 하루 계획을 세울 때에도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는 ‘일하기 ’로 크게 잡았다 . 그래야 퇴근하기 전까지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하기 ’라는 계획에 차질이 없기 때문이다 .

“늦어도 4시 30분까지는 1차 마감을 해야 해 ”라는 말이 날 굉장히 편안하게 만든다 .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 마감시간이 정해진 현장에 가게 되면 회사 차에 올라탄 뒤 가장 먼저 길 안내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상 도착시간을 확인한다 . 스케치 현장이라면 지도로 주변을 미리 본다 . 그다음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운다 . ‘내려서 몇분 동안 광각렌즈를 이용하고 그다음 몇시까지 망원을 쓴다 . 마감하는 데에 평균 ○분이 걸리니까 몇시부터는 무조건 마감을 시작한다 ’는 .

며칠 전 , 조출 근무였고 오전 9시 일정이 있었다 . 적어도 오전 8시에는 회사에서 출발한다는 계획을 세운 다음 조금 일찍 집에서 나섰다 . 지하철을 타고 얼마 못 가 기습시위가 있어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 금방 다시 출발할 거라 생각했는데 13분 동안 정차했다 . 그때부터 교통정보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 9시 일정에 조금만 늦기’로 계획을 바꿨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 팀장이 괜찮다고, 조금 늦더라도 챙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 오열했다 . 계획이 어긋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 조금은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루였다 .

회사 안팎의 사진기자 선배들은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한다 . 늦으면 늦는 대로 ,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지내면 된다고 얘기하는데 아직 내겐 그게 어렵다 . 아직 연차가 낮아서 , 경험이 부족해서 이러는 걸까 .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조언해준 그 선배들처럼 내가 현장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성향이 바뀌려나 . 누군가 그려준 계획을 실행하던 내가 스스로 계획이란 걸 세우게 된 것처럼 .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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