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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초라함의 몫

등록 2022-01-19 18:07수정 2022-01-20 02:33

[숨&결] 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할머니는 고모처럼 살지 말랬다.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고모를 많이 봐서 생긴 것도 고모를 닮았고 인생도 고모처럼 산다고 걱정했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고모는 절대 닮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65년생인 고모는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진보정당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도 다녀왔다. 이후 정당은 여러 분파로 갈라졌다. 고모는 노동과 탈핵, 기본소득 운동을 중심으로 정당에서 일하기도 하고 시민단체에 적을 두기도 했다. 그런 고모를 보고 할머니는 남들처럼 편하게 살지 왜 그렇게 사느냐고 타박했다. 자식 중 유일하게 대학 나온 게 저 모양이라는 말은 할머니의 단골 멘트였다. 주 논점은 고모의 연봉이었고 그 나이 되도록 집 한채 없다는 거였고 볼품없는 행색이었다.

할머니에 따르면 고모는 초라했다. 새 옷을 사지도 않았고 멋진 정장 같은 걸 입지도 않았다. 꾸미는 데는 관심이 없고 유기농이나 무농약 식품 같은 것에만 돈을 쓴다며 할머니는 답답해했다. 할머니의 탄식 앞에 고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모 곁에는 사람이 많았다. 노동, 환경, 탈핵, 대안교육, 장애해방 등의 가치를 좇는 동료들이었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고모는 초라하지 않았다. 나는 고모를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모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입지 않아도, 고모 명의로 된 부동산이 없어도,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이 없어도, 매일같이 정당 혹은 시민단체 가입 신청서를 들고 다니며 후원을 권유해도 그는 나의 고모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고모가 초라해 보였다. 핵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대전 지역에서 탈핵운동을 하며 매일같이 팻말을 들러 나가는 그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때, 정치를 하겠다고 소수 정당 소속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고모에게 어떤 언론도 주목하지 않을 때 그랬다. 엄마는 안 그래도 정당 이름도 헷갈리는데 고모가 속한 정당은 방송사 주관 토론회에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같은 돈을 내고 입후보해도 소속 정당과 지지율, 자본 규모에 따라 노출 빈도가 달라진다는 고모의 말을 수어로 통역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지상파 3사 주관 티브이(TV) ‘양자’ 토론을 한다. 말 그대로 담합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과 같은 거대 양당 말고는 한국에 그 어떤 정당도 없는 것같이 행동한다. 기득권의 행태에도 모자라 특정 유권자층의 지지율을 잡아야 한다며 평등에 반대하고 차별에 찬성한다는 이상한 말을 한다. 기필코 제정될 것이라 믿었던 차별금지법은 기약이 없고 날마다 황망한 일들이 쏟아진다.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다. 이쯤 되면 30대 여성 페미니스트이자 농인의 자녀, 예술가인 내가 가진 한표와 다른 이의 한표가 정녕 같은 것인지 평등선거의 원칙을 의심하게 된다.

초라하다. 그렇지만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할머니가 고모의 삶을 초라하다고 말하는 것도 싫고, 소수 정당 소속이며 지지율이 높지 않은 누군가를 초라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싫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서, 연봉이 적어서, 부동산이 없어서, 인맥이 없어서, 잘 차려입지 않아서, 남들과 달라서 초라해지는 사회는 더더욱 싫다.

뜻을 굽히지 않고 소신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초라해지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초라함은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온다. 할머니는 고모를 초라하다고 했지만 정작 고모는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누가 누구를 초라하게 만드는가. 지금 초라함을 만드는 건 가진 게 없어서 불평등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언론과 거대 양당을 비롯한 기득권의 결정들이다. 초라함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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