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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정체성 위기에 빠진 이재명의 경제 공약

등록 2022-01-27 17:03수정 2022-01-27 18:37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23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포일 어울림센터에서 부동산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23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포일 어울림센터에서 부동산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현 |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묻고 더블로’식 공약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지난해 말 소상공인 피해 보상에 50조, 100조까지 투입하겠다고 한 것을 필두로 주택, 수도권 교통, 주식시장, 가상자산 등 주요 경제 공약이 어느덧 엇비슷해진 형국이다. 후보 이름을 가리면 누구의 공약인지 모를 지경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이번 선거의 향배를 좌우할 것이라는 2030세대·수도권·중도층의 표심을 어떻게든 잡으려는 후보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공약 이행을 위한 재원이나 구체적 청사진이 빠져 있어 공약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이런 경쟁은 애초 정책에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윤 후보보다 ‘유능한 경제대통령’을 자임했던 이 후보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이 글을 쓰는 건 특정 후보에게 훈수를 두려는 게 결코 아니다. 대선 선거운동 단계에서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나아가 실행 가능한 청사진까지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 상황은 마치 배가 산으로 가는 것 같아서다.

이런 공약 경쟁은 지금 이 후보의 정체성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 후보가 진보세력을 온전히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 진보성’을 가진 후보임은 분명하다. 기본소득·국토보유세 같은 공약이 이를 상징했다. 상당수 유권자들이 이에 거부감을 느끼자 후퇴했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문제는 이를 대신하는 진보적 의제를 내놓지 못한 점이다. 이른바 ‘소확행’으로 불리는 각종 생활 밀착형 공약들과 ‘5-5-5’(5대 강국, 국민소득 5만달러, 주가 5천 시대)라는 성장 정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심지어 보유세 강화라는 진보적 정책 기조마저 흔들렸다. 이 후보의 정체성이 의심받기에 이른 것이다. 지지율이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을 뚫지 못하는 데도 이런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신뢰성에도 의문부호를 던진다. 이 후보가 도덕성은 잘 모르겠지만 ‘유능함’에서는 남다르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현실성이 떨어지는 공약들이 남발되면서다. 예컨대, 서울에 주택 107만호 공급 공약은 현재 서울 전체 주택 호수(301만호)의 3분의 1을 넘는 엄청난 규모다. 공급 신호를 주는 건 좋지만 그 실현 방안은 모호하다. 김포공항·용산공원 주변에 신도시급 물량을 공급한다는 계획은 203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초저금리 시대가 마감하면서 수도권도 집값 조정이 시작된 상황인데 이런 ‘공급 폭탄’이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공급을 얘기하려면 ‘임기 내 입주’라는 손에 잡히는 공약을 내놔야 한다. 서울에 신도시급 부지를 찾기는 어렵지만 1천~2천세대씩 공급할 수 있는 국유지·시유지는 아직도 많다. 몇몇 전문가가 실제 조사해보니, 서울 8만호, 수도권 전체로는 20만호가 가능하다고 한다. ‘유능한’ 후보라면 이런 곳에 청년층을 위한 50층짜리 주상복합을 지어 임기 내 ‘기본주택’으로 제공하겠다는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진보적 경제학자는 이 후보의 공약을 총평해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진보적 어젠더는 잘 보이지 않고, 성장·5대 강국·돈 퍼주기 공약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표가 되면 뭐든 해주는 후보라는 이미지까지 생겼다. 이렇게 해서는 중도층의 신뢰를 얻기 힘들다.”

이런 위기는 이 후보와 선거 캠프 핵심 참모들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는 어차피 분배는 잘 할 것으로 유권자들이 믿을 것이니 성장 공약을 내세워 중도층으로 확장하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5대 강국’ 공약은 윤 후보의 잠재성장률 4% 달성 공약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지역·세대·직종별로 세분화한 생활 밀착형 공약에도 함정이 있다. 예컨대,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확충 공약은 해당 지역 유권자들에겐 반가운 소식일지 모르나 여타 지역 유권자들은 오히려 집값 불안이 재연될까 걱정할 것이다.

모름지기 진보 후보의 경제 공약 핵심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보수 후보가 성장과 토건을 통해 이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진보 후보는 분배와 공정경제를 말해야 한다. 진부한 주제 같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 이루지 못한 지난한 숙제다. 다만 공짜로 나눠주는 식이 아니라, 중소기업·비정규직 등 경제적 약자들이 기여한 몫을 정당하게 가져갈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치·경제·관료·언론 등 기성권력의 강고한 동맹으로 짜여진 기득권 체제를 해체해야 한다. 이런 진보적 의제를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점진적 방식과 중도층도 설복할 수 있는 순화된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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