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노인들이 지지하는 정당은 있어도 노인들의 정당은 없다

등록 2022-02-02 11:23수정 2022-02-03 02:32

할머니가 기다리던 손님
언스플래시
언스플래시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할머니, 오늘도 손님 맞으러 나갔어요?” “어? 아, 그거! 오늘도 나갔지.” 이런 대답을 하며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우리를 맞아주던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흠칫 놀랐다. 한쪽 얼굴이 심하게 붓고 눈 밑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쭤보니 이틀 전 화장실 앞에서 미끄러지면서 세면대에 얼굴을 부딪쳤다고 한다. 때마침 그날 오후에 멀리 사는 아들이 오랜만에 전화를 해왔다. 아들은 ‘엄마, 별일 없어요? 몸은 괜찮아요?’라고 안부를 묻는다. 할머니의 대답은 ‘지금 넘어져서 광대뼈에 금이 가고 얼굴에 멍이 들었어’였을까. 아니다. “응, 괜찮아”였다. 그렇게 할머니의 고통은 아들에게 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집안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다.

아픈 노인들에게는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할 정부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흔히들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인들을 대변하는 정당은 있는가. 왕진 가서 만나는 아픈 시골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 중의 하나는 ‘집에서 죽고 싶다’이다. 지역사회 통합돌봄서비스의 핵심 정신도 가급적 끝까지 집에서 돌봄 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은 정기적이고 체계화된 ‘방문진료’이다. 의료진이 집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아픈 노인은 결국 (요양병원이든 요양원이든) 시설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선 후보들 중에서 방문진료에 대한 공약을 제시하고 있는 후보는, 내가 알기론 단 한 사람뿐이다. 설사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정책이 제대로 실현된다는 보장도 없다.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이 얼마나 실행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웹사이트 ‘문재인미터’에 따르면 현 정부의 공약 실행률은 임기 4년이 지난 시점(2021년 5월23일)까지도 17%에 불과했다. 소위 촛불정부라고 불린 정부인데도 그랬다. 왜일까. 촛불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고 대통령의 얼굴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견인과 견제가 없는 시민의 정부는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노인들의 이익을 정치적 의제화하고 끝까지 잘 수행되도록 견제·감시할 세력이 없는 한, 아픈 노인들의 처우는 결코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50플러스’, 뉴질랜드의 ‘뉴질랜드 제일당’ 등은 대표적인 외국의 노인 이익추구 정당이다. 2017년 총선에서 각각 3%와 7%의 지지율도 얻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인들이 지지하는 정당은 있어도 노인들의 정당은 없다.

처음 왕진 갔을 때 순간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신 걸로 착각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현관문이 안 열렸다. 안방에서 현관까지 열 걸음도 안 되는데도 무릎 관절염이 심해 한참 걸렸기 때문이다. 여쭤보니 장 보는 일도 어려워 아침, 점심 식사가 똑같았다. 바이러스를 옮길까봐 사람 만나는 일이 두려워진 세상이라 장 보는 걸 도와주던 이웃의 왕래도 끊어졌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매일 낮 두시면 아파트 복도로 손님을 맞으러 나간다. 할머니도 이 손님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맞았다. 하나뿐인 아들은 어쩌다 한번 전화를 하지만 이 손님만큼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할머니를 찾아왔다. 만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도 없었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늘 문 앞 복도에서 멈춰 섰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떠났다. 그래서 할머니는 기를 쓰고 현관문을 열고 복도까지 마중을 나갔다. 그에게만큼은 아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퍼렇게 멍든 얼굴을 내밀 수 있었고, 안짱다리가 심해져 몸의 짐이 되어버린 무릎도 다 드러내놓고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손님은 자신 앞에 내어놓은 할머니의 얼굴이며 다리와 팔을 따듯하게 쓰다듬어 주다 가곤 하였다.

그 손님의 이름은, 정부도 돌봄도 아닌, 햇빛이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