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 편집인
이번 대선이 네거티브와 막말, 후보 자질 논란 등으로 최악이라지만 성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주요 후보들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에 공감하고 분권형 권력구조로 가는 방안을 내놓은 건 특기할 만하다. 유력한 방안으로 책임총리제가 제시됐는데, 대선 이후 새 정부에서 현실화할지 지켜볼 일이다.
주요 후보들은 대통령 권한 분산, 총리와 내각 권한 확대, 통합 정부 등 ‘분권형’의 길을 명확히 했다. 19대 대선 때 후보들이 정치권력·권력기관 개혁(문재인), 작고 효율적인 정부(홍준표), 기득권 타파와 협치·통합의 정치(안철수) 등 정치권력 개혁에 방점을 둔 것과 대조적이다.
대선 후보들이 스스로 대통령 권한을 줄이겠다고 나서는 건 예삿일은 아니다. 1987년 체제로 통칭되는 현행 5년 단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이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이다.
큰 틀에서 분권형이지만 후보 간 차이는 제법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국민의당,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는 국회 추천 책임총리제를 언명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총리와 장관의 자율성·책임성 확대 등으로 사실상 책임총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1일 열린 중앙선거방송토론위 주관 대선 후보 초청 1차 토론회에 앞서 후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이재명 후보는 현행 헌법하에서 국회 추천 총리제를 시행한 뒤 대통령 4년 중임제, 감사원 국회 이관 등의 분권형 개헌에 나서는 방안을 제시했다. 현재로선 가장 현실적인 방법 중 하나다. 이 후보는 개헌 시 필요하면 임기 1년 단축도 수용했는데, 파격적이어서 외려 무게감이 떨어진다. 대통령 임기 문제는 국민 뜻을 확인하는 게 먼저다.
윤석열 후보는 “제왕적 대통령제는 폐지된다” “내각제가 가미된 대통령 중심제라는 헌법 정신에 충실하겠다”고 했다. 장관 추천권 등을 보장하는 책임총리제를 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민주당의 170석 의석을 의식한 탓이겠지만 국회의 총리 추천을 언급하지 않아 아쉽다. 대신 나온 분권형 책임장관은 말장난 같아 보인다.
윤 후보는 취임 때부터 청와대를 없애고 광화문에 대통령실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너무 나갔다. 공간적 개방성이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대선 이후 두달 만에 청와대를 뚝딱 옮겨 취임한다는 건 무리로 보인다.
안철수 후보는 연합정치를 통한 정당 추천으로 총리·장관을 선임하겠다고 했다. 국회 추천 총리제를 제시한 모양새다. 국회 의석이 미미한 만큼 불가피한 선택인 셈이다.
심상정 후보는 국회 추천 총리제, 대선 결선투표를 제안했고, 내각제 개헌에 방점을 찍었다. 책임총리제를 내각제로 가는 중간 다리로 여기는 것이다. 이상적이지만 국민의 내각제 불신을 해소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대선 이후 분권형의 길을 실질적으로 밟아나갈 수 있느냐다. 그 시금석은 새 대통령 당선자가 책임총리제를 전제로 조각을 하느냐 여부다. 개헌, 선거제 개편 등은 나중에 하면 되지만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은 정권 구성 단계에서 실천할 수 있다.
대통령 당선자는 산적한 국가 현안 대응에 골몰하는 와중에 몸을 무겁게 하는 책임총리 같은 약속은 뒤로 미루고 싶어질 것이다. 좋은 핑계는 상대방, 즉 야당의 비협조, 뒷다리 잡기일 테다. 야당도 우리가 집권하면 해보려 했는데 이 마당에 뭐 하러 하냐고 할 수 있다.
선거 이후 풍경이 벌써부터 그려지긴 한다. 우리 풍토에서 대선 직후 책임총리제가 관철될 가능성은 높게 봐서 30% 정도다. 비관적이다. 하지만 정치권은 매번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목도하는 국민의 분노를 알아야 한다. 35년의 전철이 또 반복된다면 국민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차기 정부가 책임총리제라는, 독선·독주를 막는 안전판을 장착하고 출발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는 정권 운명과도 직결된다. 처음에는 거추장스럽지만 길게 보면 효과가 클 수 있다. 브레이크 없는 5년 단임의 질주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모두가 아는 바다.
이번 대선은 분권형의 길을 착실하게 밟아갈 천재일우의 기회다. 주요 후보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방안을 제시했다. 당장 25일 정치 분야 텔레비전 토론에서 네 후보가 누가 되든 분권형 책임총리제를 하겠다는 합의를 내놓기를 기대한다. 또 투표의 기준으로 누가 더 실질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다.
새 대통령 당선자가 선거 직후 패배한 야당들에 달려가 책임총리 후보를 추천해달라고 진정성 있게 요청하는 순간 우리 민주주의는 큰 한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kcbae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