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산업·교육·부동산·교통정책과는 아무런 연계도 없이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다. 그저 선거 때만 내놓는 구색 맞추기용 정책에 불과하다. 그래도 민심이 들끓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자 숙명이라면, 감수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거짓말이나 희망고문은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다.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속도 내는 GTX…‘교통혁명’인가 ‘수도권 블랙홀’인가”.
2018년 12월에 나온 <한겨레>의 기사 제목이다. 정부의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건설 계획이 탄력을 받고 있다는 걸 소개하면서 광주대 교수 이민원의 우려를 곁들인 기사였다. “비수도권에 투자를 해도 모든 자원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상황이다. 지티엑스가 개통되면 수도권 블랙홀 현상이 심화돼 국가균형발전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지티엑스는 교통 불편 해소와 집값 부담 완화가 목적이었다지만,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강갑생이 잘 지적한 것처럼 부동산 시장의 ‘태풍의 눈’이 되고 말았다. 아니 ‘지티엑스 전쟁’이었다. 노선과 역의 수혜를 입은 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고, 이를 지켜보는 비수혜 지역의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으며, 이는 격렬한 항의 집회로 이어지곤 했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확장 관련 공약을 내놓고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티엑스와는 무관한 지방민들은 지티엑스를 위해 투입될 100조원 넘는 재정의 일부라도 지방으로 돌리라고 요구할 법도 한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난 수십년간 역대 정권들이 벌여온 ‘지역균형발전 사기극’에 당할 만큼 당했기에 체념의 지혜를 터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방민은 그저 각자 자기 지역에 국한된 공약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며, 일부는 자식을 서울로 보내는 각자도생 문법을 택했다.
국가의 장래를 논의하는 대선을 맞아 “이대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겨레> 경제에디터 김회승은 2021년 7월
“대선 후보들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지티엑스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지티엑스는 지방 인구와 경제력이 수도권에 더 강력히 흡수되는 빨대 효과를 부를 공산이 크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도권 진입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고, 지티엑스 노선을 따라 줄줄이 더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서울 도심과 강남은 더 붐빌 것이다. 지금도 전 국토의 12% 남짓한 공간에 국민 절반이 모여 산다. (…) 지방 소멸은 더 빨라질 것이다. 현재 전국 면 단위 지역 중 병원이 없는 곳이 76%다. 슈퍼마켓 하나 없는 곳도 45%나 된다. 학교는 어떤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하는 중이다. 말로는 지역균형을 외치면서 온갖 인프라는 수도권에 집중한 당연한 결과다. 후보들의 해법이 궁금하다.”
문제의 핵심을 짚은 탁견이다. 그러나 거대 양당의 후보들이 내놓은 해법은 ‘지티엑스 확장’이었다. 두 후보는 마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처럼 신나게 ‘지티엑스 확장’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들은 수도권 전역을 평균 30분대 생활권으로 연결하는 ‘지티엑스 혁명’이라는 천진난만한 꿈을 이루겠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이를 보다 못한 <경향신문> 논설위원 박종성은 최근 칼럼에서 “지티엑스 공약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역균형발전은 ‘선거용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두 후보는 물론 두 정당의 진심은 지역균형발전은 ‘선거용 정치적 수사’라는 것이니 말이다. 앞서 소개한 이민원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대선 후보들에게 사기의 의도는 없었다고 한다면, 이건 ‘분업의 저주’다. 지역균형발전은 산업정책, 교육정책, 부동산정책, 교통정책과 연계돼 있으며 그렇게 다뤄야만 한다. 일자리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한 지역균형발전은 불가능하다. 수도권의 부동산·교통정책이 기존 수도권 집중 추세를 전제로 하는 한 더 많은 사람들을 수도권으로 불러들여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산업·교육·부동산·교통정책과는 아무런 연계도 없이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다. 그저 선거 때만 내놓는 구색 맞추기용 정책에 불과하다. 그래도 민심이 들끓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자 숙명이라면, 감수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거짓말이나 희망고문은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
이 글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할 독자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30년 넘게 같은 주장을 반복하다 보니 나 스스로 질린다. 나 역시 체념의 지혜를 발휘하면서 가급적 지방 문제에 대해선 글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다만 대선 후보들이 지방에만 오면 지역균형발전을 큰소리로 외치는 걸 참기 어려웠을 뿐이다. 지역균형발전은 산업·교육·부동산·교통정책과 한묶음으로 추진해야 작은 개선이나마 이룰 수 있고, 이게 지방 소멸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출발점이다. 지방 소멸을 당하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나 당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