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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홍콩을 위하여 쓴다

등록 2022-03-03 15:51수정 2022-03-08 02:32

영화 <화양연화>(2000) 스틸컷.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한때를 뜻한다.
영화 <화양연화>(2000) 스틸컷.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한때를 뜻한다.

이지혜 | 경제팀 기자

나는 이미 지나간 것, 다시 오지 않을 것, 그런데 영영 잊을 수는 없는 것에 끌린다. 내가 홍콩과 왕가위를 좋아하는 이유다. 몇달 전 시큰둥한 마음으로 마블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봤다가 느닷없이 샹치 아버님, 양조위에게 ‘덕통사고’를 당했다. 원래도 ‘덕후 기질’이 충만한 나는 잠시 잊고 있던 홍콩에 다시 빠져 지난 두어달 걸신들린 듯 홍콩 영화만 봤다. 오래전 아시아를 뒤흔들고 전설이 된 명작들부터, 아마 양조위마저 ‘내가 이런 영화를 찍었던가’ 하고 가물가물할 범작과 망작까지 가리지 않고 무려 50여편이나.

왕가위로 시작해 장만옥, 장국영, 유덕화, 여명의 필모그래피를 훑고 이들의 과거 예능·인터뷰·무대인사 영상을 탐닉했다. 홍콩 음악도 닥치는 대로 주워들었다. 국내에도 영화 <천장지구>의 배경음악으로 잘 알려진 홍콩 밴드 비욘드에 반해서 알아먹지도 못하는 광둥어 가사를 떠듬떠듬 따라 부르는 지경이다. 홍콩 붐이 비단 내게만 온 건 아니다. 레트로 열풍 속에서 2030은 적극적으로 홍콩을 소환하고 있다. 요 몇년 새 한국엔 홍콩 테마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재발매된 왕가위 영화 오에스티(OST) 레코드는 없어서 못 산다. 영화관들도 오래된 홍콩 영화를 재개봉하고 굿즈도 만들어 판다.

이리도 꾸준한 인기는 홍콩 영화에 시공간을 초월한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인생의 황금기를 살면서도 그걸 자각하기란 쉽지 않은데, 홍콩 사람들은 그걸 할 줄 알았던 것 같다. 홍콩은 일국양제라는 이름의 ‘유효기간’이 붙은 독특한 땅이기 때문일 테다. 불안한 내일이 오기 전에 오늘을 불사르는 홍콩의 세기말 정서는 다른 시대, 다른 땅에서 부유하는 청춘들 마음도 위로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 젊음은 홍콩에 신세 지고 있다.

어김없이 유튜브에서 홍콩 노래를 찾아 듣던 평범한 저녁, 나는 어느 영상 하나를 만나곤 무척 심란해졌다. 영상에 등장한 홍콩 군중은 반송환법 투쟁을 위해 거리에 모여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며 비욘드의 ‘해활천공’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애타게 자유를 갈망하는 노랫말을 가진 ‘해활천공’은 홍콩의 ‘아침이슬’인 모양이었다. 홍콩 투쟁에 너무 오래 무관심했던 것 같아 심장이 철렁했다.

홍콩 시위대에 뒤늦은 마음이라도 보태야겠다 싶어 황급히 찾아봤다. 부끄럽게도 나는 홍콩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홍콩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굵직한 단체들은 중국 당국의 보복 위협 탓에 해산한 지 오래였다. 낮엔 속 편하게 기자입네 취재하고 기사 쓰고, 퇴근 뒤엔 홍콩 영화를 뒤적거리는 나로선 홍콩 언론 상황이 특히나 당혹스러웠다. 한때 언론 자유의 피난처였던 홍콩에서 대표적인 자유언론이 줄줄이 폐간하고 있고, 홍콩 기자들은 고발당하고 끌려가고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자 면허제’가 추진된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 뒤로 한참 마음이 덜그럭거렸다. 홍콩에 너무나 미안했다. 나는 홍콩의 이미지를 실컷 소비하고, 영화 세트장 취급하고, 그 찬란했던 세월을 다신 되찾지 못할 거란 점에서 오는 멜랑콜리를 은근히 탐미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홍콩 시위대가 우리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는 소식에만 들떠 잠깐 흥미를 보이고, 진짜 그들의 시위를 들여다볼 생각은 못 했던 나의 철없음은 또 어떤가. 홍콩 붐은 왔는데 홍콩 투쟁에 대한 관심은 식어버린 이 상황이 스스로 생각해도 괘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홍콩의 투쟁을 지켜보는 것’ 외에 딱히 없다는 점이 죄책감을 더 건드린다. 그동안 나는 그조차 못한 것이다. 이제는 내 젊음이 홍콩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은 해보기로 했다. 지난 주말에는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일하는 홍콩 기자 동지들에게 기부금을 보냈다. 오늘은 내게 허락된 이 지면을 홍콩을 위하여 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라고는 하지만,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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