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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한순간의 위안이라고 해도

등록 2022-03-10 18:39수정 2022-03-11 09:21

서혜미 | 이슈팀 기자

“너 기사에 나오고 싶냐?”

기자 일을 잘 아는 친구들은 가끔씩 내게 이런 반협박성 농담을 던진다. 아주 유명한 기자가 아니고서야 기사 본문에 이름이 등장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에는 미담 기사보다 부정적인 내용이 담긴 기사가 더 많으므로, 기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기자 이름이 본문에 나온 기사들을 떠올려보면, 기자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사건에 연루됐거나, 예기치 않은 피해를 당한 사례들만 생각난다. 물론 미담과 새로운 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등장할 수도 있겠으나, 동종업계 사람들은 자신이 기사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의 살벌한 농담이 무색하게 “서아무개씨”로 기사에 나온 적이 있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아름답거나 긍정적인 내용으로 나온 건 아니었다.

대학생 때 겪은 일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내 입장에선 좀 억울한 일이었다. 운이 좋게도 언론에서 내가 당한 일에 관심을 가져서 몇몇 기자들의 연락을 받았다. 어찌나 억울했는지 수업 도중에 나가서 20~30분간 통화를 하기도 했고,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기사들을 읽고 또 읽었다. 길지 않은 건조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기사가 쓰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때 나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기사 한두개로 그 상황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에서 오는 불안을 덜 수는 있었다. 적어도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최소한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됐을 것이므로. 그 사실 자체가 내게 주는 위안이 있었다.

지난 한두달 사이에 제보 몇건을 받으면서 그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불합리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했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게 굴러간다. 제보 10건을 받는다고 하면, 여러 이유 때문에 실제 기사로까지 이어지는 제보는 1~2건에 불과하다. 설령 기사가 나간다고 해도 제보자가 겪고 있는 상황이 곧바로 해결될 가능성도 낮다. 신기하게도 어떤 제보자들은 이미 제보 단계에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들어줘서 고맙다”거나 “기사를 보고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예기치 않은 불행이나 불합리와 싸우는 사람들은 외로운 순간이 많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아마 오래전의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출근하는 게 설렜던 나날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최근 몇개월 사이 일과 삶에 대한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의미를 늘 생각하고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기사를 쓰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대체로 말과 글의 힘은 세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일과 비극은 계속 일어난다. 기자조차 자신이 쓴 기사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일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던 차에 제보자들의 마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떤 때에 기자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아주 짧은 순간의 위안일지라도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내가 접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전부 기사화되지는 못할 것이다. 기사가 발행되더라도 그 사람이 잃은 기회를 다시 얻기는 어려울 테고,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시간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비통한 마음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잠시나마 위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 감시 등 익히 알려진 언론의 역할과 비교하면 ‘사람들이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목표는 지나치게 소박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니, 당분간은 그 마음에 기대 직장생활 권태기를 견뎌봐야겠다.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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