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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겸허하게, 담담하게

등록 2022-03-17 16:01수정 2022-03-18 02:01

지난 6일(현지시각)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 쉼터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추위를 피하고 있다. 메디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6일(현지시각)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 인근 쉼터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추위를 피하고 있다. 메디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김혜윤 | 사진뉴스팀 기자

이 일을 하다 보면 ‘아…’ 하면서 주어진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있다. 재작년 겨울 사무실에서 갑자기 내리는 눈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을 때, 뉴스팀장에게서 ‘혜윤아 눈 온다’는 6음절 메시지를 받았을 때도 그랬다. ‘그렇구나… 내가 가는구나’ 하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광화문 네거리를 겸허하게 가서 취재했다. 올해 삼일절에도 오랜만에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다.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인근에서 취재하고 있던 오후 3시24분,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날 아침 오랜만에 회사 앞에서 출근길에 만난 부장과 함께 폴란드 국경 지역 취재를 가면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나눈 지 6시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혜윤씨 여권 있지?” 이번에는 7음절이었다. 오랜만에 ‘그렇구나… 내가 가는구나’ 하며 덤덤히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회사로 들어와 챙길 수 있는 짐을 챙겼고, 장비 관련해서 담당 선배와 연락했다. 알고 보니 기한이 9년 남은, 작년에 갱신한 여권을 1년여 만에 마주했다. 얘를 쓸 일이 당분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국외 출장이 생길 수 있다는 선배들 이야기에 사무실에 두고 있었지만 설마 쓰겠나 싶었다.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여권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가는구나’ 생각했다.

운명을 수용한 다음부터 눈앞에 닥친 현실에 정신이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발급받아야 하는 서류도, 검사도 여럿이었다. 대사관 누리집을 몇번이고 들어가보고 블로그에서 최근 폴란드에 입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준비사항 중 빠뜨린 건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출국 전날인 4일까지 출국 준비에 굉장히 예민했고 혹여나 코로나에 걸릴까봐 약속도 다 취소했다. 매일 아침 자가검사키트로 음성 확인을 하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100% 결과를 믿었겠지만 이번에는 의심부터 했다. 태어나서 처음 받은 유전자증폭(PCR)검사 결과를 받아들고 나서야 안심했다. 폴란드에서 중국인 혐오가 심하다는 말을 듣고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태극기 배지와 스티커 등을 샀다.

취재 현장에서 태극기를 알아보고 말 거는 외국인이 제법 많았다. 수월한 취재가 될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내 국적이 아니라 직업이었다. 폴란드어도 우크라이나어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는 예상했다. 겨우 얻은 정보로 간 취재현장에서 ‘노 카메라!’라고 자원봉사자나 군인들이 말하면 착잡해진다. <에이피>(AP)나 <아에프페>(AFP), <로이터> 사진을 보면 어떻게 다 찍었나 싶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도 얌전히 수용하고 있다. ‘나는 <아에프페> 소속 세르게이가 아니다’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구글 지도에서 내가 이동한 경로를 날마다 표시해주는데 시간 날 때마다 이걸 보는 게 은근 재밌다. ‘이렇게 여기저기 다녔나’ 싶으면서도.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내가 있는 이곳이 폴란드가 맞는지, 꿈은 아닌지 생각한다. 폴란드에서 두번째 일요일을 맞이한 오늘, 기차를 6시간 타고 바르샤바에서 다시 프셰미실로 돌아가고 있다. ‘지엥쿠예’(감사합니다)와 ‘지엔 도브리’(안녕하세요)가 이젠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꿈속에서 취재하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니 여기 와서 구글 지도로 내 동선을 보지 않았다. 내 이동 동선이 표시된 지도를 보면 내가 지금 폴란드에 있다는 현실을 깨닫게 될 듯하다.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여 폴란드에 왔지만 카메라를 들고는 담담하지 못했다. 지금 카메라를 드는 일이 옳은지 몇번이고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눈으로만 찍은 장면이 몇번 된다. 열차 승강장으로 가는 지하통로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성들이나 열차 안에서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는 난민들의 모습 등. 그래서일까.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오기 전 담담함이나 걱정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렇구나… 내가 가는구나’ 하고 갔던 현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이유가 따로 있는 건지 몇번 더 운명을 겸허히 수용해봐야겠다.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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