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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상상력

등록 2022-03-23 19:37수정 2022-03-25 11:33

[숨&결] 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다루는 영화 〈기억의 전쟁〉이 일본에서 개봉됐다.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지만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일본의 우익단체가 ‘한국도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성폭행을 저질렀으니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 영화를 예로 들까봐 우려했다.

지난 3월19일에는 후쿠오카시에 위치한 규슈대학교 한국연구센터 주최로 영화 상영 및 대담 행사가 열렸다. 위 학살 사건을 20여년간 취재해온 고경태 <한겨레> 기자가 쓴 책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을 번역한 히라이 가즈오미 교수(가고시마대학교 법정책학과)와 대담을 나눴다. 책을 번역하게 된 경위를 묻자 그는 한국의 서점에서 우연히 책을 발견했다고 했다. 베트남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한 국가인 한국이 제국 침략의 피해자성만 내세우는 게 아니라 본국의 가해자성을 직접 다룬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출판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다들 난색을 표했다. 동남아시아의 전쟁사를 다룰 뿐 아니라 일본이 참전하지도 않은 전쟁사라 수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판권이 팔렸을 때 내가 우려했던 것처럼 책이 일본 우익단체의 논리의 근거가 될까 걱정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번역본은 영화의 일본 개봉 시기와 비슷한 때에 출간되었다. 같은 사안을 다루고 있어 영화와 책을 함께 소개하고자 대담을 하게 되었다.

우려와는 달리 관객들은 성숙했다. 한국의 여성 감독이 참전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기억을 경유하여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전쟁과 학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영화를 보며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된다고 했다. 또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겪은 전쟁의 피해국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관객 한 명이 일본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는 의미에 대해 물었다. 내가 줄곧 해왔던 고민과도 닿아 있었다. 나는 말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죠. 일본이 참전하지도 않은 전쟁 이야기를 왜 일본인인 우리가 봐야 하느냐고. 일본은 베트남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미국에 대한 병참지원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뒀죠. 그로 인해 고도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고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트남전에 전투병력을 파병하면서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국내 경제 개발 사업을 진행하며 경제성장을 이뤘죠. 이 전쟁을 단순히 베트남과 미국의 싸움으로만 바라보면 놓치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돈을 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나 자신을 한국인 혹은 일본인이라는 특정 국가의 국민으로 설정하면 이해관계를 벗어나 평화를 논하기 쉽지 않다. 경계를 허물고 관점을 확장하여 동아시아인, 아시아인, 지구인의 시선을 가진다면 사안을 더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일본 관객은 영화에 등장하는 베트남인 학살 생존자와 그에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를 통해 일본의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관객들의 관점을 경유하여 한국의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재일조선인 저술가이자 작가인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을 단순히 한국 국적, 조선적, 일본 국적으로 나눌 수 없고 그렇게 나누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며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양자택일론과 내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과 그를 가능하게 하는 연대란 무엇일까. 히라이 교수는 책을 번역하며 베트남 중부의 피해 마을을 답사하고 싶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언젠가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과 베트남 평화기행을 가는 날을 꿈꾼다. 그곳에서 시작할 평화의 논의를 그려본다. 서경식 작가가 말했던 유럽연합(EU)의 동북아시아판, 동아시아 공동체의 시작이 될 것이라 감히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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